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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본드, 세월에서 기품을 얻다, 숀 코너리
사진 이혜정박은영 2001-06-13

‘근사하게 늙어가는 법’이라는 교본이 나온다면, 저자는 분명 숀 코너리(71)일 것이다. 연륜이 선사하는 지혜나 안정감이나 원숙함은 접어두자. 그는 얼굴에 깊이 팬 주름살과 은빛으로 변색된 머리칼이 황홀할 수 있음을 보여준 흔치 않은 배우다. 그에게 열광하던 소녀가 아줌마가 되고 그 딸들이 다시 그를 추앙한다. 그의 팬들은 이미 세대 교체됐지만, 그는 여전히 ‘섹시한’ 남자다. 심지어 해가 갈수록 그 매력이 짙어진다. 나이와 매력이 정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는 듯이. 젊은 시절의 그가 테스토스테론 과잉으로 들척지근한 매력을 과시했다면, 지금의 그는 낡은 악기처럼 깊은 울림을 준다. 불가사의한 그 매력의 기원은, 아무래도 일가를 이룬 장인의 여유와 위엄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너무 좁았던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는 얼마 전 특별한 나들이를 했다. 구스 반 산트의 신작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성공도 실패도 두려워’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를 유폐시킨 천재작가 윌리엄 포레스터를 연기한 것이다. 그는 출신이 비천해 재능마저 의심받고 추락하려는 흑인 소년에게 날개를 달아주면서, 생과 예술에의 욕구를 되찾는 포레스터를, 그다운 에너지와 카리스마로 체현해냈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인간관계를 깊이있게 그려낸 영화.

이건 바로 내가 보고 싶던 영화였다.” 숀 코너리는 한 인터뷰에서 그의 인생에도 윌리엄 포레스터 같은 은인이 있었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미국 배우이자 감독인 로버트 핸더슨으로, 그가 아니었다면 숀 코너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의 선수로 뛰었을 것이라고. 그랬다면, 숀 코너리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영화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왕족 등의 상류층 캐릭터에 적역이지만, 숀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노동계급 출신이다. 트럭 운전수와 청소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열세살에 학교를 그만둔 뒤, 해군에 입대하고, 우유를 배달하고, 공사장에 드나들고, 관을 닦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53년 미스터유니버스에 출전, 입상하면서 연극무대에 섰고, 54년 <봄에 핀 라일락>으로 영화 데뷔했다. 시원찮은 조연배우에 머물렀던 그가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62년 007시리즈에 캐스팅되면서부터.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는 이 따위로 천하지 않다. 지성으로 단련된 인물이어야 한다”면서 숀 코너리의 캐스팅을 반대했지만 숀 코너리는 1탄 <닥터 노>의 성공으로 멋지게 복수(?)했고, 83년 <네버세이 네버어게인>까지 7편의 시리즈에 출연하며 제임스 본드를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까지 부상시켰다. 마티니를 홀짝이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신무기와 무공과 기지를 동원해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첩보원, 본드, 제임스 본드.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오락영화에서 숀 코너리는 영웅주의와 쾌락주의의 상징, 남성들과 여성들의 판타지였다.

“세상을 살다보면 용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제임스 본드로 남을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돈도 많이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지루한 일이다.” 숀 코너리가 40년 넘도록 ‘배우’일 수 있었던 것은, 제임스 본드에 머물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래서 다소 분열적이다. 세상의 권위와 규율에 맞서는 혁명가적 기질은 그에게도, 그의 페르소나 속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007시리즈에 묶여 있을 때에도 다른 성격의 작품과 캐릭터를 찾아 헤맸다. 히치콕의 <마니>, 시드니 루멧의 <힐>, 존 휴스턴의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에서, 그리고 오스카를 안겨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쳐블>에서 그는 본드의 그림자를 거둬내는 데 성공했다. 이언 플레밍은 경솔했다. <장미의 이름으로> <인디아나 존스3> <파인딩 포레스터> 등에서 숀 코너리가 뿜어낸 지성과 기품은 ‘연기’가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세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과 액션스릴러에 즐겨 출연하고 있는 숀 코너리는 크리스천 슬레이터와 리처드 기어, 케빈 코스트너, 니콜라스 케이지의 아버지이거나 스승으로, 미셸 파이퍼와 줄리아 오몬드, 캐서린 제타 존스의 연인으로, 작품에 무게감과 윤기를 보태고 있다. 함께 출연하는 젊은 배우들이 머물 자리는 하릴없이 그의 그늘 밑이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배우들이 넘어서야 할 ‘산’과 같은 존재로, 지금도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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