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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민식의 마음 [4]

“어차피 세상은 나 혼자라고 생각해요”

남재일 | <취화선>에서 장승업 같은 실존 인물을 연기하셨는데, 여태까지 안 해봤지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실존 인물이 있다면?

최민식 | 특별히 염두에 둔 인물은 없고요… 가족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해요.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엄마 아빠 얘기 나오면 눈물 줄줄 흘리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그만큼 가족에 대한 감정이 각별한 민족인데, 조금 영악하게 생각하면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는 소재가 가족이죠. 그런데 다들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가족>이라는 영화가 나왔다는데 한번 가서 보려고요. 그리고 또 하나 정말 폼나게 가진 자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한풀이식의 드라마는 많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하고 폼나게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그런 사람이 흔치는 않겠지만… 모든 게 풍요로운 사람들이 더 외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독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고 가는 거거든요. 나는 어차피 세상은 나 혼자라고 생각해요. 집사람이 있고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어도 나는 외롭다, 단지 순간순간 그 사람으로 인해 내 외로움을 잠시 잊을 뿐이다, 나는 언제든지 순식간에 나 혼자 던져져버릴 수 있다, 나는 그걸 숙명적으로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남재일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최민식 |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관계에서 오는 건 위안일 뿐이라고.

남재일 | 그럼 고독에 대처하는 노하우라고 할까, 고독과 대면해서 인생을 견디는 기제가 발달했을 듯싶은데….

최민식 | 좀 익숙해졌을 뿐이죠. 굳은살이 좀 생겼을 뿐이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고 방법도 못 찾았던 것 같고. 그냥 뭉개다보니까 굳은살이 생긴 거죠. 어떤 친구들은, 특히 여자들은 혼자 있는 거에 대한 공포가 대단하더라구요. 나는 자취도 오래했고 혼자 보낸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혼자 있는 게 편해요. 집사람한테 내쫓길 얘기지만 집사람도 귀찮을 때가 있고. 혼자 휑뎅그레한 집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할 때가 자유롭고 편해요.

남재일 | 눈빛이 소년처럼 맑아 보입니다. 최민식씨에게 반듯함이 있다면 그런 소년적인 선량함에 대한 지향일 것 같은데….

최민식 | 선량함에 대한 지향은 별로 없어요. 오히려 나쁜 애들이 좋아요. 불법유턴 잘하는 그런 애들이 매력적이고 재미있어요. 흔히 배우한테 굉장한 도덕성을 강요해요. 그거 아니에요. 바랄 걸 바라야죠. 태생적으로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에요. 너무너무 감성적이서 좋아하는 거 안 하고 못 배기죠. 그래서 다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고… 대마초에 쉽게 빠져들기도 하고 그러죠. 그걸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키려는 건 아니고 저 개인적인 생각인데… 전인권 선배만 해도 사회적인 반듯함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형님이에요. 유명한 일화가 있잖아요. 전인권씨가 대마초를 해서 취조를 받는데, 검찰 조사관이 수차례 대마를 투약하고, 라고 쓰니까 “여보세요, 투약이 아니라 흡입이라고 그러세요”라고 그랬다고. 검사도 웃고 조서 쓰는 양반도 웃고. 옆방 검사들은 와서 사인받고….

남재일 | 전인권씨의 경우처럼 사람을 판단할 때 사회적인 규범의 잣대와 개인적인 잣대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까? 있다면 사람을 볼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있나요?

“이라크 파병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

최민식 나는 얼마 안 살았지만 나름대로 사람을 볼 때 옳고 그른 데 대한 기준은 있어요. 그 기준으로 세상을 보죠.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도 어떤 당을 지지하거나 정치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동기로 한 거예요. 이라크 파병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요. 이 경우는 사회적 규범과 어긋난다고 할 순 없지만, 어긋나는 경우라도, 그래서 불이익을 당한다 하더라도 주관적인 판단은 필요하죠. 이건 인간으로서 너무나 비열한 짓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설령 사회적 규범으로 위장한다 해도 동의해선 안 되죠. 겉으로 떠도는 규범은 가식투성이 아니에요.

남재일 | 영화 찍고 남는 시간에는 뭐하세요?

최민식 | 빈둥빈둥 무위도식하고 놀아요. 나는 취미가 없어요. 골프를 친다든지 낚시를 한다든지 바둑을 둔다든지 이런 취미가 없어요. 전형적인 불교 집안에서 자라서 낚시도 못해요. 어머니가 정통 불교 신자는 아니고, 약간 무속쪽이라서, 어렸을 때부터 방생하는 데 무지하게 쫓아다녔거든요.

남재일 | 다음 작품이 <주먹이 운다>인데, 어떤 영화인가요?

최민식 | 일본에 진짜 있었던 전직복서 얘기죠. 그 사람이 잘 못 나가다가 은퇴하고 사업을 하다가 망했는데 토낀 게 아니라 신주쿠 광장에 서서 돈받고 맞아주는 일을 해요. 살기 위해서. 찡하잖아요. 제가 맡은 역할이 이 사람이고, 여기에 서철이라는 재소자 복서 이야기가 덧붙여져요. 콩가루 집안에, 수사반장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인 사연을 갖고 있는 인물인데, 감옥에서 복싱을 배워요. 이 두 사람이 신인왕전에서 만나서, 서로 같은 처지이면서 살기 위해서 치고받는 그런 얘기죠.

그는 <주먹이 운다> 얘기를 할 때 눈빛이 가장 빛났다. 아마도, 트럼펫 연주자보다는 복서가 그와 더 닮았을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그는 인간은 혼자라는 사실을 누차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정서는 연민이라고 했다. 그리 타인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서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어떤 힘을 그는 연민이라고 했다. 그는 매끄럽고 세련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맑고 곧아 보였다. 그리고, 마음에 깊은 우물을 간직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개인사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시시콜콜 자신이 살아가는 얘기를 세상에 하는 게 싫다고 했다. 그는 그냥 덮어두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피로했던 탓인지 그는 이날 기침을 많이 했다. 종종 그의 말은 기침 같았고, 기침이 말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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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남재일/ 문화평론가 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