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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공연 가진 에미르 쿠스트리차의 음악파트너 고란 브레고비치
사진 이혜정 정리 박혜명 2005-06-23

“진정한 음악은 MTV 너머에 있다”

고란 브레고비치. 만약 이 이름이 낯설다면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 음악을 떠올리면 된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음악가 고란 브레고비치는 동향 출신의 감독이 만든 세편의 영화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 <아리조나 드림>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담당했던 뮤지션이다. 그는 1950년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16살에 ‘비옐료 두그메’(하얀 버튼)라는 록밴드를 결성, 16년 동안 1500만장의 앨범을 팔아치웠고 현재는 20명 내외로 구성된 ‘웨딩 앤 퓨너럴 밴드’를 이끌고 있다. 자신의 뿌리가 되는 발칸 반도의 음악을 현대적인 문법으로 사려깊게 구사하는 브레고비치의 음악은, 쿠스투리차 영화 속에 담긴 슬라브족의 지난한 삶과 깨끗한 희망을 구체적이고 아름답게 들려준다.

지난 6월11일 고란 브레고비치가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공연은 처음이다. 이 기회에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씨와 함께 그를 만났다. 무려 40년간 지속돼온 자신의 음악적 삶에 관해, 브레고비치는 애써 겸손한 척하지 않으면서 밝고 재치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놓았다. 변방의 월드뮤지션이 가진 음악적 견해와 자의식까지 흥미롭게 접하는 동안, 예정된 1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만나서 반갑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당신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극동 지역에 와서 공연하는 건 처음이다. 대만, 싱가포르 같은 데서는 해봤지만 내 음악을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연주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난 아주 작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음악의 큰 문화와 비교해볼 때 내 음악적 문화는 아주 작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분명히 좋다. 지금 전세계 사람들은 MTV를 보고, MTV에 나오지 않는 음악은 따라서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아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는 MTV에 비치는 모습보다 실제가 훨씬 좋고, 음악인도 MTV에서 비칠 때보다 실제가 더 똑똑하다.

-당신의 음악은 한국의 전문적인 뮤지션들도 굉장히 중요한 레퍼런스로 받아들인다. 특히 매우 활동적이며 적극적인 펑크밴드들과 인디밴드들이 당신의 음악을 참고한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내 음악이 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메세지를 자신들 음악에 담고 싶어서인 것 같다. 논리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음악은 언제나 역사 위에서 쓰여진다. 바꿔 말하면 음악이란 늘 전통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브람스, 스트라빈스키, 거슈윈, 존 레넌, 폴 매카트니, 보노 등이 그랬다. 아무리 모던한 음악을 한다고 해도 음악이란 결국 자기 문화의 뿌리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테마에 기반해 있다. 내 음악은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것이 내 나라와 한국 같은 서로 작은 음악적 문화끼리의 연결지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록뮤지션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당신은 록이라는 보편적인 문법을 통해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뿌리박고 있는 문화에서부터 음악을 시작한다. 그 두 가지가 잘 결합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뮤지션들이 당신의 음악을 좋은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은 언어다. 음악은 첫 번째 사람의 언어다. 인간은 언어를 다듬기 전에 음악을 먼저 했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음악이 제1의 사람의 언어다(the first human language).

-당신이 태어난 사라예보는 한국 사람들에게 다소 생소한 도시이다. 30년 전쯤, 이에리사라는 한국의 여자 탁구선수가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혹시 당신도 알고 있는지. (웃음)

=안다.

-의외다. 어떻게 그 일을 기억하나.

=그냥 그 여자선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사라예보라는 도시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랬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결국 사라예보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는 뜻밖에 안 되겠지만. (웃음)

=나도 안다. 사라예보는 전쟁 때문에 더 많이 유명해졌다.

-당신의 고향에 대해 얘기를 더 들었으면 한다. 당신이 그곳에서 지낼 때 사라예보는 문화적으로 어땠고, 길거리 레코드숍 같은 데서는 어떤 음악들이 주로 흘러나왔는지 궁금하다.

=난 공산주의 시기에 태어났지만 티토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그는 러시아, 중국 등 타 국가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고, 덕분에 사라예보는 아주 작은 도시였음에도 반경 100m 안에 가톨릭, 그리스정교, 모르몬교, 무슬림 사원들이 함께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대도시처럼 많은 문화가 혼합돼 있는 장소였다. 난 그런 곳에서 태어났다. 그 때문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 혼합이 정치적으로는 많은 분쟁을 낳고 피를 불러왔지만,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모던할 수 있었다. 다른 모든 문물은 구식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음악가로서 내가 그런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행운이다.

-당신이 젊었을 때 록음악을 접하게 된 것도 그런 개방적인 분위기와 관련이 있나.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육군 대령이었는데 매일 밤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열곤 하셨다. 그때부터 음악을 접했고, 15살 때 바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16살 때는 스트립바에서 연주했다. 난 내가 평생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여자 나체를 그때 봤다. (웃음)

-아버지가 그걸 허락하셨나.

=우리집은 분위기가 자유스러웠고, 나도 빨리 집에서 독립하고 싶어서 15살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18살에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했고 20살이 되기 전에 마약을 끊었다. (웃음) 그러고나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4년 동안은 음악 활동을 안 했다. 철학을 공부했는데 그때는 철학을 한다고 하면 마르크시즘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 위한 거였다. 문화 활동의 90%도 마르크시즘을 도구로 사용했다. 나 역시 졸업 뒤 3년 정도는 마르크시즘을 음악에 활용했다. 우스운 도구였지만 그렇게 했다. 그러던 중 전쟁이 터졌고 난 모든 걸 잃었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난 아주 드물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사람이 자기 삶을 두번이나 제로지점에서 시작한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파리로 망명할 수 있었다. 망명이란 육체적으로는 매우 불편한 상황이지만 예술적으로는 예술가들에게 가장 좋은 시기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은 창작욕을 낼 수 있다. 나도 망명 시기에 에미르 쿠스투리차로부터 영화음악 제안을 다시 받았고(<집시의 시간>은 망명 전에 작업한 것이다- 편집자) 처음부터 일을 다시 시작했다.

-모든 걸 다 잃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난 돈 많은 록스타였다. 알겠지만 록스타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다. 난 잘생기고 기타 연주도 잘하고 모든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록스타였다. 근데 전쟁으로 다 잃었다. 집, 자동차, 보트….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좋았다. 내가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들을 잃은 것뿐이니까.

-그때가 몇살이었나.

=34, 35살쯤? 처음 몇년 동안은 닥치는 대로 했다. 내가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들까지 했다. 전쟁이 터지고 3년 동안은 영화음악과 광고음악도 닥치는 대로 했다. 향수나 마가린을 위해서도 음악을 만들었다.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예술가들이 돈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기 위해서는 돈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당신은 60년대에 록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을 시작했는데, 유고슬라비아에서 록음악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에서도 록음악을 한다는 것이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발전해왔겠지만, 공산주의사회에서 록음악에 매겨지는 가치는 좀 다르다. 공산주의사회에서 록음악은 너무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인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조금만 더 심하게 표현하면 감옥에 갈 수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허가와 같다. 음악적으로 록음악을 하는 건 별게 아닐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분명히 다르다.

-비옐료 두그메는 정말 경이적인 밴드였다. 앨범도 굉장히 많이 팔았다. 밴드의 성공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전통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난 로큰롤 시대에도 로큰롤을 한 적은 없다. 집시 브라스 밴드를 구성하거나 슬라브 군대 음악을 했다.

-그간 영화음악도 병행해왔는데, 금전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영화음악을 만들면서 그 작업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을 것 같다.

=내 진정한 첫 번째 영화음악은 <집시의 시간>인데 그건 순전히 에미르 쿠스투리차와의 우정 때문에 한 것뿐이다. 알겠지만 영화음악은 돈도 안 되고 명예도 별로 따라주지 않는다. (웃음) <집시의 시간>은 예산문제 때문에 아예 돈을 받지 않고 작업했다.

-당신이 쿠스투리차 감독과 해온 작업이 특히 훌륭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에미르 쿠스투리차와 고란 브레고비치를 종종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집시의 시간> 때문에 당신을 집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 나라에서 뮤지션이 된다는 건 곧 집시 일을 한다는 걸 뜻했다. 어릴 때 우리 아버지도 나에게 “제발 그런 집시 일 좀 하지 마라”라고 말하곤 하셨다. (웃음)

<집시의 시간>

-발칸 반도에서는 집시 음악이 그렇게 대중적인가.

=나에겐 집시 음악이 유일하게 모던한 음악이었다. 집시들은 비록 MTV를 보지 않지만 음악이 생존수단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능한 온갖 것을 동원해서 모던한 음악을 개발해낸다. 멜로디는 스페인에서, 리듬은 이탈리아에서, 하모니는 또 어디에서. 나에게도 그들과 작업하는 것이 편했다.

-쿠스투리차와 함께 작업하기에 별로 수월했을 것 같지 않다. 그 사람도 나름대로 훌륭한 음악적 감각을 가진 사람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재능있고 현명한 감독들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동안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음악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가끔 작업실에 와서 음료수나 마시면서 수다를 떨다 갔다. 사소한 부분들만 좀 수정했을 뿐, 그는 일단 음악이 완전히 입혀지고 난 영화를 보고 싶어했다.

-<아리조나 드림>에서 이기 팝과의 작업도 인상적이었다.

=난 쇼비즈니스계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 음반에서 유명한 사람들과 작업한 것은 다 어릴 때의 일이다. 그들과 작업하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사람들은 내 음악을 좋아하고 내가 작업한 영화들도 좋아한다. 이기 팝도 <집시의 시간>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와 난 작업도 함께했지만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다.

-이번 공연에 함께 온 ‘웨딩 앤 퓨너럴 밴드’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밴드 이름대로 진짜 결혼식과 장례식에서도 음악을 연주하나.

=우리 밴드는 결혼식과 장례식 음악을 아주 잘 연주한다. 물론 그게 주업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런 행사에 가서 음악을 연주해줄 때가 있다. 그들의 전문분야이기도 했다. (웃음) 재밌다. 우리 밴드 멤버는 학교를 3개월만 다닌 사람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까지 아주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당신 음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밴드의 이름에서 묻어나는 것 같다. 당신의 음악은 일상과 늘 긴밀한 끈을 갖고 있다.

=내 고향은 아직도 결혼과 장례가 모든 사람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겨지는 곳이다.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난 언제나 그런 순간에 연주되는 음악이 가장 중요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왔다. 결혼이나 장례식에서 쓸 수 있는 음악을 다 제하고 나면 내 음악에 남는 것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내 음악은 전통적인 문화에서 왔고, 앞으로도 그런 음악가로 남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집시 음악은 죽었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스토랑 음악이 됐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이 모든 음악을 죽였다. 재즈도 그래서 죽었다. 모든 아름다운 집시 음악과 루마니아 음악, 헝가리 음악, 플라멩코가 레스토랑 음악이 되면서 죽었다. 집시 음악은 브라스가 중심이기 때문에 연주하는 동안 침을 계속 뱉어야 한다. 그러니까 레스토랑에서 오래 연주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15명쯤 되는 집시 브라스 밴드가 무대에서 연주하면서 침뱉는 모습을. 최대 30분이다. 30분 연주하고 나간다. 그럼 다른 밴드가 들어오는 식이다.

-사실 여러 음악의 요소들을 갖다 섞는 것은 쉽다. 그건 이미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방식이다. 더 중요한 건 그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다. 당신의 음악에서 좋은 아교 역할을 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음, 글쎄, 잘 모르겠다. 난 프로페셔널한 작곡가다. (웃음) 솔직히 아티스트들이 말하는 것들은 다 말도 안 되는 것들(bullshit)이고, 난 그냥 다른 사람들이 일하듯 내 일을 한다. 기자가 기사를 쓰고, 치과 의사가 이빨을 치료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일을 난 해본 적이 없다. 평생 음악만 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을 모아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일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내가 자란 곳에 이미 그런 혼합이 존재했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의 음악 중에 <Ya Ya Ringe Ringe>만 해도 집시 음악에 힙합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방식이 놀랍다.

=난 동시대 음악가다. 옛날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동시대 음악들을 끌어다쓰는 것이 내 일이고, 그것이 내가 동시대 음악을 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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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