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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사랑할 권리가 있다, <아파트>의 고소영
김도훈 사진 이혜정 2006-06-27

프롤로그

소문이란 게 원래 믿을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소문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면, 고소영은 까탈스러운 디바다. 그날의 시작을 한번 되감아보자. 촬영을 위해 복도의 창문을 판자로 막는 대공사를 거친 3층짜리 카페 겸 게스트 하우스. 시간에 딱 맞춰 현장에 도착한 고소영에게 사진기자가 의상 컨셉을 설명한다. 돌아온 것은 왠지 퉁명스러운 한마디. “만약 제 몸에 맞지 않으면 그건 못 입어요.” 유난히 후끈한 날이었다. 촬영도 후끈해지겠구나 싶었다. 제 몸에 맞지 않으면 못 입어요. 그 첫마디가 질낮은 대패로 비벼댄 나뭇결처럼 까칠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고소영은 완벽하게 준.비.완.료.였다.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그는 3층 건물을 3시간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완벽한 옷을 까다롭게 고르지만, 일단 몸에 맞는 옷을 찾으면 후회없이 돌진하는 배우. 그렇지. 고소영은 신인배우가 아니지. 4년을 쉬었다고 13년차 배우의 노련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고소영의 귀환

고소영이라는 배우로부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코드들이 있다. 차갑고 이지적이고 세련되고 약간 앙칼진 도시 여자. 이같은 고소영의 코드들은 지난 10여년간 좀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적이 없었다. “좀 깍쟁이 같아서 다가가기도 힘들고, 이런 이미지 말인가?” 물론이다. <엄마의 바다>의 경서 같고, <비트>의 로미 같은, 바로 그런 오래된 이미지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성격이 내성적인데다 나서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 있어도 표현 못하는 게 많다.” 재미있는 사실이라면 고소영의 이미지가 종종 오해를 받았을지언정 근원적인 매력을 상실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변신에 능한 성격파 배우들이 스타의 자리까지 동시에 꿰어찬 한국에서, 고소영은 일정한 이미지를 변주하며 스타의 자리를 도도하게 지키는 할리우드 스타를 떠올리게 한다. 친근한 옆동네의 배우가 아니라 근사한 언덕 위 저택 속의 스타들.

그래서 4년을 내리 쉬었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워낙 확고한 이미지를 간직한 배우라 4년을 쉬지 않아도 신선도(와 개런티)를 유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소영은 “기간으로 따지자면 꽤 긴 시간이지만 특별히 작품을 고르면서 기다리는 상황이 아니어서 단번에 시간이 흘러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객이 체감하는 시간은 다르고, 영화계가 체감하는 시간은 또 다르지 않은가. 고소영은 반문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배우라는 직업은 스트레스가 많다. 그리고 나는 예민한 배우여서 여러 가지 일을 다중적으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며 나를 소모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최고의 상태로 최선을 다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4년 동안 쉰 것에 대해서도 결코 후회없다.”

고소영과 <아파트>

고소영이 4년 만에 선택한 귀환의 무대는 밤마다 불이 꺼지는 오래된 아파트다. <폰>과 <가위>의 안병기 감독은 원혼과 미스터리의 미로 속에 무참히 던져넣을 페르소나로 고소영을 골랐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눈꺼풀의 움직임까지 세세하게 주문하는 안병기 감독이 고소영을 선택하다니. (재미있는 의미에서) 불이 붙겠구나 싶었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지난 4년간 영화계를 떠났던 고소영이 안병기 감독을 귀환의 파트너로 택한 속내 역시 의외라는 뜻이다. 뭔가 근사하고 도도하고 값비싸 보이는 역할로 돌아오리라던 예상이 어긋난 것이다. 고소영은 단호하게 반문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역할은 아니다. 사람들이 고소영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잖나. 이미지 변신이라는 말만 내세우면서 팬들이 원해왔던 것과 완전히 어긋나게 가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파트>라는 영화 자체의 이미지가 좀 강하기는 하지만, 차갑고 세련된 주인공 세진의 이미지는 원래부터 나에게 있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그동안 안 해본 캐릭터인데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걱정 같은 건 없다.”

고소영과 안병기

그렇다면 그냥 시원하게 물어보자. 신인배우들에게 눈을 깜빡이지 말라고 호통치던 안병기 감독이다. (또다시, 재미있는 의미에서) 불이 붙는 순간들이 없었을 리 없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겠다. 감독님은 그동안 신인배우들하고만 작업을 하셔서 초반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도 있었다. 솔직히 스트레스도 받았다. 대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주문하시니까 배우로서의 제약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부탁했다. 연기하는 배우의 느낌도 존중해달라고. 나중에는 감독님도 내 의견을 백 프로 존중해주셔서 서로 만족스럽게 촬영을 마쳤다. 사실 처음 겪어보는 스타일의 감독님이라 나 역시도 굉장히 독특한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할까.” 적당한 긴장이 살아 있는 현장이 더 재미있을 건 뻔하다는 말을 보냈더니 당연히 그게 재미있는 거 아니냐는 눈빛이 돌아왔다.

고소영은 확실히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배우로서의 감각에 많은 것을 기대는 사람이다. 풀어놓으면 알아서 감을 찾는 동물이다. “그때 그때 느낌이 오는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동물적인 것 같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동물적으로 움직이는 필이 왔다든지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물론 된다. “<아파트>에서 우는 장면이 하나 있다. 울고 있는데 특수효과 팀장님이 그러는 거다. 어, 진짜로 우네? 배우가 진짜로 울지 어떻게 가짜로 우냐고 반문했더니 요즘은 거의 다 가짜로 운다더군. 눈에 안약 넣고 말이다. 물론 감정이 안 나오면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대본만으로 슬퍼지지 않으면 다른 상상을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나도 슬픈 척만 하라면 할 수도 있다. 근데 그런 거 말이지. 나에겐 너무 닭살스럽다. 내가 무슨 대단한 연기자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연기는 진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고소영의 숙성

그러고보면 벌써 12년이다. 고소영이 <엄마의 바다>와 <비트>로 (지금은 이름도 생경하게 들리는) X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것이 90년대 중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연풍연가> <러브> 등을 거치면서 전도연, 심은하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던 것이 90년대 후반이었다. 한명은 악바리 같은 연기파가 되었고, 한명은 완벽하게 사라졌고, 고소영은 휴식을 즐기겠다는 선언을 하고 잠시 떠났다. 그동안 영화계는 대변혁을 겪었다. 웰메이드 영화, 천만 영화라는 말이 사전에 올랐다. 4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천만 관객이라는 말은 참 생소하다. 4년 전에는 제작보고회와 VIP 시사라는 것도 없었고, 한류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것들이 많은 에너지를 나에게 주는 것 같다. 이제는 배우들이 잘 연기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갖추어진 거다. 내가 연기할 때는 그런 것들이 없었는데. (웃음) 하지만 불안한 부분도 있다. 한류니 뭐니 하다보니 질적으로 미비한 작품들이 다작으로 쏟아져나오고, 또 작은 영화들은 개봉하자마자 간판 내리는 경우도 많더라. 예전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무서워진 것 같다.” 고소영의 부러움과 걱정은 계속된다. “요즘 어린 친구들 일하는 거 보면 부럽다. 처음부터 프로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준비된 배우들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내가 어릴 때는 연기자라는 의식도 없이 연기한 적도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모두 다 읽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들어온 시나리오들은 뭐든지 끝까지 읽어본다. 선배가 되고보니 한 작품을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생긴 것 같다. 덕분에 작품 선택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고. (웃음)”

에필로그

고소영의 인터뷰 내용을 경어체로 풀었다가 모두 반말체로 바꾸어버렸다. 온순한 경어체로 풀어놓으니 도저히 고소영이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고소영은 깍듯하고 또렷한 경어를 조근조근 상대방에게 보내지만, 당당해 보이는 반말체로 풀어놓아야만 어간의 기가 살아난다. 하지만 고소영에게 자신의 말과 이미지가 어떻게 들려지고 해석되는지 뭐가 그리 중요하랴. 4년 만에 돌아온 13년차 여배우의 걱정과 부담, 고소영은 거기에 조금도 짓눌리지 않았다. 여전히 생생하고 당돌하고 젊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 맞다. 나는 여전히 철이 없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젊게 사는 이유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철 나기도 싫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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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정윤기·헤어 김도형·메이크업 우현증·협찬 alice+olivia(재킷), BETSEY JOHNSON(원피스), DOLCE&GABBANA(구두), rebecca taylor(원피스), JIMMY CHOO(구두), ANTONIO BERARDI(상의), obzee(하의)·장소협찬 오렌지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