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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유다, <스파이더 맨3> <마리 앙투아네트>의 커스틴 던스트
박혜명 2007-05-04

그녀는 왠지, 쉬워 보인다. 값싸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쉽게 읽힐 것 같은 사람이란 뜻이다. 깊고 길게 팬 보조개로 천진하게 웃는 단 한컷의 사진을 보면 그것이 그녀를 말하는 전부 같다. 긴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면서 “오, 저는 생각없이 사는 게 좋아요, 인생은 즐거운 거잖아요?”라고 한마디 던져주고 푸른 잔디밭 너머로 폴짝폴짝 뛰어가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특히나 국내 대중에게 인식되고 있는 커스틴 던스트는 배우라기보다 또래 여자들이 닮고 싶은 멋진 스타일을 가진 할리우드 유명인사쪽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또, 쉽게 소비해버리고 두번 곱씹을 필요는 없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커스틴 던스트는 끈질긴 생명력의 장수 여배우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3살 때부터 카메라 앞에 섰고 7살에 첫 영화를 찍어 지금까지 50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그를 인터뷰하는 해외 다수 언론들은 매번 커스틴 던스트에게 ‘아역배우로 출발해서 지금껏 큰 부침없이 연기 인생을 꾸려온 대단한 프로’라는 수식어를 붙여준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제작자 로라 지스킨은 던스트를 향해 “니콜 키드먼과 같은 존재로 대성할 것”이라는 평가를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알 듯 모를 듯해지는 금발의 활기 넘치는 여배우 커스틴 던스트에 관해, 다섯 가지 키워드를 적어 내려가기로 했다. 그의 최근작인 <스파이더맨 3>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내에서 각각 5월1일, 17일에 개봉한다.

워커홀릭 십대

커스틴 던스트는 TV광고 모델을 시작한 3살 때부터 본격 아역배우 활동 전까지 70여편의 광고를 찍었다. 9살 때 아버지를 제외한 그의 가족 전부가 뉴저지에서 LA로 건너갔고 던스트의 워커홀릭 인생은 본격적으로 막을 열었다. 어린 던스트의 연기교사의 회고에 따르면 던스트는 연기수업 빼먹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어쩌다 엄마가 챙기지 못하면 선생님한테 직접 전화해서 “저 좀 데리러 오시면 안 돼요?”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그 욕심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는 오디션 준비에만 8개월이 들어갔다. 준비 과정이란 대부분, 선생님의 말에 따르자면 “문을 꽝 닫고 나가서 상대 배우를 열받게 만드는 연기 연습”이었다 한다. 던스트는 그 압박의 시간을 “스위치를 누르면 반짝 불이 들어오는 조명처럼” 살았다. 열두살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우아하고도 욕망에 가득 찬 던스트의 연기는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로 화답받았고 할리우드에 새로운 유망주 출현을 알렸다. 같은 해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 역까지 호평받아 던스트는 열세살의 나이로 <피플> 선정 ‘가장 아름다운 인물 50’에도 들었다. 이후 <쥬만지>(1995)부터 해마다 두세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십대 시절의 던스트는 “일에 미쳐” 살았다. “인생 같은 건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일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그저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고, 그러고만 싶었다.”

스트레인지/뷰티풀

이 워커홀릭 연기자의 십대를 가장 빛나게 한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할 것 없이 <처녀 자살 소동>(1999), <브링 잇 온>(2000), 그리고 <크레이지/뷰티풀>(2001)이다. 온실 속에서 질식해가는 화초 럭스 리스본(<처녀 자살 소동>)이나 친모 자살에 충격 받아 알코올중독에 빠진 니콜(<크레이지/뷰티풀>)은 삶의 가장 예민한 시기에 부유하고 방황하는 십대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들은 남 모를 상처와 억눌림 속에서 힘겨운 성장을 한다. 배우의 사생활에서는 중단됐던 고민들이 어쩌면 영화 안에서 이뤄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던스트는 자신이 쉽게 정형화되는 길을 피했다. <크레이지/뷰티풀>의 감독 존 스톡웰도 “일부 팬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는 영화를 찍는 일이 던스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면 평범한 십대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브링 잇 온>도, 소재인 치어리더들의 이야기를 생각없는 볼거리로 전락시키지 않으려 제법 머리를 쓴 영화다. 던스트가 연기한 치어리더 단장 토랜스는 쿨하고 씩씩하고 열정적이고 생생하다.

던스트는 <아메리칸 뷰티>(1999)에서 미나 수바리가 맡았던 안젤라 역이 들어왔을 때는 단호한 거부 의사를 보냈다. “내가 그 대본을 읽었을 때가 열다섯살인데 그때의 나는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케빈 스페이시랑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고 나보고 장미 꽃잎들하고 같이 벗고 누워 있으라고?” 반면 <크레이지/뷰티풀>의 섹스신을 촬영할 때는 상대역 제이 헤르난데즈에게 “자, 물지 않을 테니까 만져도 돼”라며, 긴장한 남자배우의 손을 제 가슴에 선뜻 얹었다 한다. 던스트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 낯설고도 아름다운 십대를 똑똑하게 그려나갔다.

옆집의 쿨 걸

<뉴욕타임스>는 2004년 <엘리자베스 타운> 관련 인터뷰 때 커스틴 던스트의 얼굴을 ‘프롤레타리안-프리티 페이스’(proletarian-pretty face)라고 표현했다. ‘옆집 소녀(a girl next-door) 같다’, ‘평범하다’라는 말들을 피하고자 한, 미국 대표 일간지의 고고한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던스트는 르네 젤위거나 리즈 위더스푼에게도 종종 붙는 말로, 지극히 서민스럽고 친근한 얼굴의 소유자다. 이 친근함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은 건강함과 자연스러움이다. 던스트는 납작한 코나 광대뼈, 턱 등을 수술하자는 주위 조언들을 일찌감치 뿌리쳤고 특히, 불규칙하게 모양이 돋아서 가끔 흡혈귀 같은 인상을 주는 송곳니들을 그대로 두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하고 당당한 것이 ‘프롤레타리안-프리티 페이스’ 커스틴 던스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외모만큼 성격도 자연스럽고 거침없다. <이터널 선샤인>을 함께 작업했던 미셸 공드리 감독의 말은 이렇다. “여배우들하고 있으면 보통 우리 프랑스 사람들의 표현으로 ‘나무 혀’가 되어서, 말을 좀 조심하게 된다. 커스틴과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는 ‘난 걔는 이래서 싫고, 쟤는 저래서 싫어요’ 같은 얘기들을 스스럼없이 했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와이어 촬영은 “힘들기만 하고 진빠지고 재미는 없고, 그래서 찍기 정말 정말 싫었다”고, 어떻게 그렇게 커리어 관리를 잘하냐는 질문에 “3살 때부터 해왔는데 제대로 못하는 게 더 이상한 거”라고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던스트의 화법이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브래드 피트와의 키스신에 관해 조잘대던 열두살의 던스트는 이랬다. “정말 끔찍했다. 싫었다. 브래드와 톰은 내 큰오빠들 같았단 말이다. 당신이 한번 당신 큰오빠랑 키스한다고 생각해봐라. 완전 최악.”

리얼 셀렙

외향적이고 거침없는 옆집 쿨 걸의 인생에서 유명한 또 한 가지는 화려한 연애사. 커스틴 던스트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사귄 남자친구만 8명이다. 토비 맥과이어, 조시 하트넷, 올랜도 블룸은 촬영 중에 눈이 맞았던 경우이고 드루 배리모어의 전 남자친구 파브리지오 모레티, 패리스 힐튼의 전 애인 릭 셀레먼, 로커 조니 보렐, 배우 에이드리언 그레니어 등도 있다. 그중에서도 2년을 사귄 제이크 질렌홀과의 관계는 전세계 팬들의 관심사였는데 이들은 런던의 한 의상실 안에서 섹스를 하다 들킬 정도로 공공연한 열애를 자랑했다. 던스트는 파티광, 쇼핑광이기도 하다. 해외 패셔니스타들에 관심이 많은 우리나라 20대들 사이에서 그가 (국내 의류 브랜드 광고 모델이 될 정도로) 최고 인기를 누린 것은 이미 오래 된 얘기. 자유분방하고 스타일리시한 스물여섯의 던스트는 갈수록 ‘시끄럽고 뜨거운’ 셀러브리티가 되어가고 있다. 한때 그는 “흡연은 정말 끔찍한 습관”, “나는 약을 해본 적이 없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살면 만날 파티나 다니고 약이나 하고, 그러는 게 순식간이다”라며 본인의 금욕적인 삶을 자랑스레 어필하곤 했다. 던스트는 자기 또래들이 대학 진학과 동시에 독립할 나이에도 엄마와 함께 살다가 2002년 무렵 독립했다.

3년쯤 지났을 때

<스파이더 맨2> 당시 인터뷰에서 던스트는 이런 말을 했다. “가끔은, 3년쯤 지나야 내가 지금 왜 이 영화를 선택했던가, 왜 저걸 했던가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도 지금은 내가 왜 이 역할에 끌리고 왜 이 영화를 꼭 해야 한다고 느끼는지 모르다가, 나중에서야 아는 거다. 내 삶의 다른 부분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숨어 있는 다른 부분들을 알게 되면서 내가 과거에 특정 영화를 선택했던 이유들도 찾아지더라.”

5년 전, 던스트가 엄마와 따로 살게 되면서 얻은 것은 단순히 부모 감시하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사소한 자유들이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선택과 책임이었다. 엄격한 사립 가톨릭고등학교를 다녔고, 일에 미쳐 십대를 보냈고, 스무살이 넘어서까지도 엄마와 살았던 커스틴 던스트는 타고난 자유분방함을 이제야 다 폭발시키듯 갈수록 가십난의 단골이 되어가고 있지만, 일에서만큼은 십대 때 못지않은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자신의 이십대를 운영하고 있다. <모나리자 스마일>(2003)에서 거칠고 다소 못된 철부지 유부녀를 연기하고 나서 그는 “영화연출을 하는 게 나의 최종 목표이긴 하지만, 아직 나는 내가 떠드는 말이 뭔 소린지도 파악 못하는 스무살”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적정선의 평가를 내릴 줄 알았다. <스파이더 맨> 1편 당시 던스트는 자기가 메리 제인 역을 정말 간절하게 원했다면서 “이 역할이 나의 커리어를 한껏 끌어올려주리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특히 해외시장에서 말이다. 거기서 나는 그렇게 유명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 때는 “해외시장에서 유명해진 것 같아서 기쁘다. 이제는 내 이름으로도 투자가 된다고 했다”며 웃었다.

상품으로서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던스트는 열여덟살부터 스물다섯살 때까지 7년 동안 함께했던 캐릭터 메리 제인은 어른이 됐고 자신 또한 그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2004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 때 그는 워너브러더스 건물 옆 아파트에서 만난 여자아이 얘기를 했다. 그 아파트는 할리우드의 빛을 보고 몰려든 꼬마 배우지망생들과 그의 부모들이 마치 대기실에 지내듯 임시 거주하는 곳이다. 엄청난 경쟁과 가십의 장소이며, 한때 던스트와 그의 남동생과 엄마가 지냈던 곳이기도 했다. “여자애가 와서 자랑하듯 그랬다. ‘내 에이전트 말이 나보고 나중에 차세대 커스틴 던스트가 될 거랬어요’.”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준 다음 돌아섰다고 한다. 3년쯤 지난 지금 던스트는 그 소녀를 기억하고 있을까. 열심히 일했고 똑똑한 어른으로 성장 중인 그가 받기에 합당한 칭찬이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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