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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액션 보여드릴게요, <흑수선>의 이정재

익숙한 사람이 문득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언젠가 <흑수선>의 촬영현장에서 마주친 이정재의 모습이 그랬다. “어, 달라졌다….” 같이 있던 기자들도 한두 마디씩 비슷한 인사를 건넸다. 살이 붙고 검게 그을린 이정재의 얼굴은 이전과 달랐다. 남성적인 풍모가 짙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배창호 감독은 그런 그의 모습이 “이태리 종마 같다”고 했던가. 그런 외적인 변신은, 그의 영화 커리어 최초로 ‘액션연기’를 시도하게 됐다는 의미에 비하면, 차라리 사소한 변화였다.

여기서 잠깐. 이정재가 액션영화를 처음 찍었다는 데 대해 많은 이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정재는 꽤나 오랫동안 액션영화를 피해왔다. 순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모래시계>의 백재희의 캐릭터가 처음부터 워낙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 그는 백재희의 이미지에 갇히는 것이 두려웠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다. “의도적으로 피했죠. 그래서 더러 무리수를 두기도 했어요.” <불새>와 <박대박>을 가리키는 듯했다. 어쨌든 이정재는 자신을 ‘배우’로 다듬기 위해 서로 다른 작품과 역할들을 껴안았다. 크게 몸을 사리지 않은, 영민하고 용감한 선택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정사>로, <태양은 없다>로, <이재수의 난>으로, 다시 <순애보>로, 스펙트럼을 넓혀갈 수 없었을 터. 이정재가 액션으로 돌아온 것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으로 하는 건 쉬워요. 액션연기는 늘 자신있었어요. 그래서 서둘지 말고, 나중에 하자고 생각했죠. 이런 비유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맛있는 건 뒀다가 나중에 먹는 것처럼요.”

<흑수선>을 만나 이정재는 훨훨 날았다. 거기엔 그가 자신있어 하는 ‘액션’연기를 맘껏 선보일 수 있었다는 것말고도, 또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연기를 알게 해준 첫 영화 <젊은 남자>의 배창호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흥분. “<흑수선>에 출연하기로 한 건 배창호 감독님 때문이었어요. 안성기 선배님이 배 감독님하고 열 작품 넘게 하셨다고 하는데, 안 선배님 아닌 다른 배우가 감독님 작품에 나오는 건 못 볼 것 같더라고요. 샘이 나서.” 이정재가 연기한 오 형사는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해가는 현재의 인물. 흑수선이라는 암호명을 쓰는 남로당 스파이 손지혜(이미연)나 그녀의 보호자이자 연인인 황석(안성기)이나 일본 사업가가 된 한동주(정준호),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핵심은 과거의 세 인물들이에요. 오 형사는 과거에서 소외돼 있지만, 과거에서 사건의 동기를 찾아내 관객에게 알려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죠.” 과거의 인물들과의 대립 구도에, 긴장감과 임팩트를 실어주는 것이 오 형사 연기의 관건이었다고.

자연인 이정재에게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세련되고 모던한 피사체로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젊은 남자>의 한이 되고, 친구들과 강원도 카지노에 갔던 기억을 코믹 버전으로 재연할 때는 <태양은 없다>의 홍기가 되고, 연기와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는 그 눈매가 한결 서늘해지며 <흑수선>의 오 형사가 된다. “센 캐릭터로 밀고 나가겠다는 작전”이 여의치 않아, 이정재는 다시 멜로로 돌아간다.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옛 연인을 찾아 헤매는 부분기억상실증 환자로 분할 예정. 어떤 장르에 뛰어들든, 어떤 캐릭터에 녹아들든, 그가 다시 놀랄 만한 변신을 보여줄 거란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 이정재는 이제 스스로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허우대 좋은, 그러나 과묵한 연기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모래시계>의 백재희를, 사람들은 이제 잊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출연했던 영화들의 DVD 타이틀을 모으고 있다. 어느 게 좋은 연기였는지 판정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좋아도 나중에 후회하는가 하면, 처음엔 별로였어도 나중에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태양은 없다>에서의 연기는 처음엔 만족스러웠는데, 요즘 다시 보니, 너무 잘하려고 하는구나, 애쓰는구나, 하는 게 보이더라. <인터뷰>랑 <이재수의 난>은 당시엔 아쉬움이 많았는데, 점점 좋아진다. 깊이가 있고 인간적인 맛이 난달까.

가끔은 외도가 필요하다인테리어 사무실과 이태리 식당을 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시야가 좁아진다는 느낌도 들고. 경험도 다양하게 해보고, 좀 떨어져서 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수영할 때도 폼이 어떤지 라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할 때는 잘 모른다.

내 인생의 청사진 배우가 흥행을 책임져야 하는 실정이다. 개런티 몇억씩 받아놓고, 흥행을 책임지지 못하면, 할 일을 다 못하는 거란 생각도 들고. 연기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20대에 나는 일단 ‘나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할 거다. 30대에 배우로서 잘 익어가고 싶고. ‘잘 관리한’ 40대 남자가 제일 멋있어 보이더라. 나름대로 이런 스케줄을 짜놓았다. 이대로 흔들리지 않고 잘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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