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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 나이틀리] 교정을 거부하는 영국 여인의 자존심
오정연 2008-02-22

<어톤먼트>의 배우 키라 나이틀리

“바보야, 제일 귀한 가보란 말이야!” 발끈하여 깨진 꽃병의 조각을 찾기 위해 분수로 뛰어드는 세실리아(<어톤먼트>)는 웃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이제 막 좀더 거친 세계를 엿보기 시작한 상류층 아가씨다. 남매처럼 함께 자란 가정부의 아들 로비를 향한 마음은 스스로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장난스럽게 빛나는 눈과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입매만이 진심을 보여준다. 감출 수 없는 풋풋함. <슈팅 라이크 베컴> 이후 5년이 흘렀지만 키라 나이틀리에겐 여전히 그게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간 유명세를 더한 작품 대부분이 시대극이라니, 예쁘장한 영국 여배우에 대한 편견일까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코르셋을 집어던지는 귀족 아가씨(<캐리비안의 해적>), 여전사로 부활한 귀네비어(<킹 아더>), 진흙탕을 마다않는 고집쟁이 아가씨(<오만과 편견>) 등 적당히 고귀한 출신의 그녀들은 언제나 다른 세상을 열망했다. 이를테면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을 대신할 20대 배우가 그리 흔한 건 아니다.

“세실리아를 미화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영국인들이 고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했던 시기인 1930, 40년대, 세실리아는 폭발 직전의 압력솥처럼 감정이 넘치던 인물이다. 자신이 좀더 세고 못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사람. 요즘이었다면 세실리아와 로비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헤어진 뒤 희생을 치른다. 로비와 세실리아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마음에 드는데, 이들은 서로의 감정을 말하지 못한다. 영화나 원작 소설의 주제는 결국 말하지 못한 것에 담겨 있다. 꼭 해야 하는, 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감추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사실 여배우로서 좋은 여성 캐릭터를 찾는 건 매우 힘들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을 때마다 묘사되지 않은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적혀 있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말이다.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1940년대 영국영화를 보면서 당시 여배우들의 목소리까지 연구했다. 영국식 악센트는 물론이고, 영국식 연기의 전통이 사라진 지 오래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하고 로맨틱한 프러포즈의 주인공으로 뭇 여성들의 부러움을 샀던 <러브 액츄얼리>를 제외하면, 21세기 캐릭터로 나이틀리가 재미를 본 케이스는 전무하다. 이 모든 사태는 변화를 향한 나이틀리 자신의 열망에서 비롯됐다. 평범하게 비극적인 멜로영화 속 여주인공에 그칠지 모르는 세실리아에 대한 도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의 주인 격인 브라이오니, 한 챕터를 오롯이 이끌 권한을 지닌 로비와 달리 세실리아는 원작에서 이미 유령 같은 존재다. 게다가 ‘멜로드라마가 아닌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자신의 소설을 규정한 <속죄>(<어톤먼트> 원작의 국내 번역 제목)의 이언 매큐언의 말처럼, 로비와 세실리아의 플롯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이다. 그런데 영화 속 그녀는 의연한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노출은 전혀 없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 에로틱한 정사신을 포함하여, 자신의 역량을 강조하려 초조하게 나서지 않고, 맥없이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

“영화에서 로비와 세실리아의 정사장면이 꼭 필요하다는 건 명백한데 난 얼굴과 몸, 목소리 등을 도구로 가진 배우이기 때문에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순간을 위해 4, 5년을 기다려왔다는 걸 관객이 납득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라이트 감독은 발을 들어올리거나 입술을 깨무는 디테일 하나까지 모두 스토리보드로 만들어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일이 쉬웠다. 나는 10대를 연기하는 걸 한번도 즐겨본 적이 없다. 언제나 성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연기한 10대들이 전부 스스로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던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곳에 머무를까봐, 서른이 돼서까지 10대를 연기하고 있을까봐 두려웠다. <더 재킷>처럼 흥행이나 비평 면에서 성공하지 못한 영화들 역시 욕심을 부려서 출연했고 즐겁게 작업했다. 모두 소중할 수밖에. 게다가 <더 재킷>은 미국식 영어연기를 할 수 있고, 보통은 나에게 잘 맡기려들지 않았던 캐릭터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회였다. 엄마가 말하길, 난 태어날 때부터 45살 같았다더라. 실제로 여섯살 때, 앞으로 스스로 힘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3살부터 에이전트를 원했고, 7살부터 TV에 출연했으며, 첫 영화 출연작은 내털리 포트먼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녀 중 한명으로 캐스팅된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이었던 나이틀리는 <슈팅 라이크 베컴> 이후 5년간 1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유명 극작가인 어머니가 시나리오를 썼고, 딜런 토머스의 연인으로 출연한 <The Edge of Love> 등 두편의 영화까지 촬영을 마친 상태. 일중독의 경지다. 스무살의 그녀에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오만과 편견>에서 나이틀리는 이미 영화 속 캐릭터와 함께 자신도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빗속에서 거칠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켜버렸다. 거식증 의혹, 루퍼트 프렌드(<오만과 편견> 속 위컴)와의 소문 등에 시달린 나이틀리는 이제 출연작 의외의 질문은 삼가달라는 요청을 공식적으로 전달한다. 더이상 그녀는 사랑을 구걸하는 초짜가 아니다.

“내가 할리우드에 있었다면, 에이전트에서는 나의 이 비뚤어진 이빨을 고치자는 말을 먼저 했을 거다. 거기는 언제나 ‘넌 이걸 바꿔야 하고, 이걸 해야만 하고’ 이런 식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할리우드 밖에도 너무나 훌륭한 감독들이 많다. 똑똑한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 영화계에서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이다. 특히 영국에는 확실히 새로운 세대가 대두했다는 느낌이다. 미국의 숱한 인디영화들 역시 훌륭하다. 아, 그리고 로맨틱한 영화들. 이유를 모른 채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 논리 따위는 던져버리고 오로지 감정적인 상태에 스스로를 맡기게 되는, 사람 사이의 화학작용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연인이 함께하고 헤어지는 이유, 가장 큰 변화를 만드는 건 결국 가장 작은 일이다. 그래서 배우가 더 매력적이다.”

분수대에서의 작은 다툼 이후 5년. 28살이 된 세실리아는 런던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휴가를 나온 로비가 그곳에 들른다. 엄격한 당시 영국사회 안에서 사회적인 자폭에 가까운 삶을 사는 세실리아에 대해 영화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실리아를 연기한 나이틀리는 그녀의 힘겨운 선택을 알고 있고, 그런 이유로 세실리아를 사랑한 흔적이 역력하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로비를 다독이는 세실리아의 주문. “날 봐. 돌아와, 내게 돌아와.” 이젠 장난스런 미소가 아닌 간절한 속삭임도 어색하지 않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 가장 아름답지만, 깔깔대는 사춘기 소녀의 얼굴 뒤에 감춰진 숱한 표정이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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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U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