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황정민] “나 힘뺐어요”

<그림자 살인> 배우 황정민

변신은 배우 황정민의 운명이지만 선택은 자유다. 그런데 그는 이번 선택으로 꽤 무리수 있는 역할을 뽑아든다. 조선시대의 사립탐정 ‘진호’. 시대극은 흥행작 리스트에서 제대로 이름을 올려본 지 오래고, 탐정물은 충무로에서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장르다.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기꺼이 선택을 한 황정민의 포부는 사뭇 크다.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을 신경 쓰는 대신 그는 ‘연기 같지도 않은 연기’를 하는 진짜 명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눈치챘나? 다소 생소한 조선시대의 탐정 진호는 바로 배우 황정민의 연기 영역을 넓혀줄 시도의 한 과정이다.

“전 뭐, 연기 평생할 거니까요.”

황정민과 무수히 인터뷰를 하고, 그가 한 수많은 말들 중에 유독 이 한마디는 떠나질 않는다. 연기자가 계속 연기하겠다는 거야 뭐 별스럽겠냐마는 수더분한 차림의 황정민이 툭 내뱉은 이 짧은 문장은 꽤 흡입력이 강해 곧잘 그의 역할들을 삼켜버릴 괴력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달콤한 인생>의 징글징글한 백 사장도, <너는 내 운명>의 열혈 노총각 석중도, <사생결단>의 미치광이 마약단속반 형사 도 경장도, 황정민이 연기한 수십여편의 영화도, 이 한마디에 적용해보면 그의 ‘평생 연기’ 중 한 작품일 뿐이다. 각 작품들 모두 연기력과 흥행과 평가가 중요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에게 손쉽게 ‘안녕’을 고할 수 있는 정거장 같기도 하다는 편한 마음을 먹어버리게 되는 거다. 이 배우의 완성형은 ‘평생’이 될 것이니, 언제나 그의 과거보다는 ‘다음은 또 뭐야?’ 하는 기대가 앞설 수밖에. 스타성이 전무해 보이는 배우 황정민은 이렇게 묘하게 관객의 눈과 귀를 오롯이 자신의 연기 하나로만 옭아매두는 수를 둔다. 입버릇처럼 내뱉는 이 배우의 한마디는 그래서 혜택이 확실한 종신형 보험처럼 꽤 믿을 만하다.

<그림자 살인> 시리즈화에 욕심

최근 연극열전 <웃음의 대학>으로 대학로 흥행의 주역이 된 황정민. 그의 ‘다음’은 황정민의 ‘평생’을 보장해줄 제법 든든한 캐릭터다. 박대민 감독의 데뷔작 <그림자 살인>에서 황정민은 한국영화에서 좀체 보기 힘들었던 사설탐정 진호 역할에 도전한다. 구한말, 탐정 홍진호의 주력 종목은 바람난 부인, 돈 떼먹고 도망간 놈 찾아주기. 돈만 준다면 마다할 게 없는 제법 능글맞은 탐정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까지와는 스케일이 다른 의뢰가 들어온다. 살인 누명을 쓰게 될 위기에 처한 의학도 광수(류덕환)가 장안의 세도가댁 아들 민수현(오태경)의 살해범을 밝혀달라며 그를 찾아온 것이다.

거액의 현상금이 탐나 사건에 손을 대지만 곧이어 같은 수법으로 발견된 최고 권력가 경무국장의 시체를 맞닥뜨리면서 그는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간다. 조수는 의학지식이 풍부한 광수, 조력자는 여류발명가 순덕(엄지원)이다. 권력가들의 잇단 죽음에 경찰청이 뒤집히는 사이, 사건의 실마리는 공중곡예단이라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탐정 진호의 활약은 여기서부터다.

영상이 덧붙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칫 ‘탐정’이라는 말에 너무 초점을 두지는 말길 당부한다. 진호가 자신이 하는 사건 수사가 어엿하게 ‘탐정’이 해내는 역할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영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다. 그전까지 그에게 살인사건의 해결은 집 나간 여편네, 돈 떼먹고 달아난 놈 찾아주기와 매한가지일 뿐이다. 맥고모자에 잔뜩 구김이 간 헐렁한 진호의 단벌 양복은 저 멀리 <셜록 홈스>의 명탐정 홈스가 입었던 바바리코트가 주던 카리스마와 달리 볼품없으며,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을 과연 제대로 해결할까 싶은 성격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속 멋진 탐정 필립 말로우의 예리함을 정확히 비껴 나간다(진호에게 이 장르의 멋진 탐정들이 보여주는 여성 편력은 굳이 설명 안 해도 부재하단 걸 짐작했을 거다). 그런데 서구 탐정들과 달리 번득이는 재치와 카리스마를 장착하지 않고도 진호는 제법 조선의 탐정이라고 자랑해도 괜찮을 만큼 사랑스럽다. <그림자 살인>의 묘미는 이 지점이다.

“어릴 때 <피라미드의 공포> 같은 어드벤처물을 참 좋아했어요. 우리 영화는 살인사건이지만 탐정물이 기반이니 얼마든지 변형 가능하겠더라고요. 잘만 하면 시리즈물로 가도 되겠다 싶은 욕심이랄까. <007>이나 <리쎌 웨폰> 같은 시리즈를 하는 건 배우로서 꿈꿀 만하죠. 우리도 역사를 파보면 <인디아나 존스>에서 찾는 것보다 더한 보물도 있을 테고요. 그래서 감독님 만나자마자 시리즈에 대한 욕심을 밝히고 갔어요. 이전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된 거죠.” 물론 처음부터 덥석, 이 영화를 반기지는 못했다. 공교롭게도 원래 <공중곡예사>라는 가제가 붙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 든 건 <검은집>을 촬영하던 때였다. <검은집>을 함께하고 있던 PD가 시나리오가 좋다며 한번 읽어보길 권했고, 결과적으로 그 말이 틀리지 않을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신인감독이라는 게 영 걸렸다. 신인감독과 하는 작업의 고충을 그는 <검은집>을 통해 막 겪고 난 터였다. “그때 여기저기서 ‘황 감독’이라는 말 많이 들었어요. 내가 사사건건 감독을 간섭한다는 이유였겠죠. 그런데 영화가 잘못 갈 거 같은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이 큰 소리로 번져버린 셈이다. 결국 대화의 기술이 문제였지만 그 과정을 굳이 또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게 감이 있어요. 이 대본은 나한테 오겠다는 감 말이에요. 대본 처음 볼 때부터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국 제가 하게 된 거죠.” 이왕 하기로 결정한 거 전작에서 저질렀던 실수는 하지 말자 다짐했다. 황정민에게 이번 촬영의 제1수칙은 그래서 ‘유연해지자’가 됐다. “제가 원래 험상궂게 생겨서 그냥 이야기해도 오해를 사잖아요. (웃음) 그래서 이번엔 할 말 있어도 스탭들 앞에서 막 떠들지 않고 감독님과 PD랑 조용히 이야기했죠. 어느 날인가 PD가 ‘형, <검은집> 때랑은 너무 달라요. 즐기는 것 같아요’라고 하더라고요. 전 그랬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즐기는데 그땐 방법을 몰랐다’고.”

촬영장에서 뺀 힘은 진호의 일거수일투족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극의 초반, 가벼운 기조로 가던 캐릭터가 사건을 맡으면서 잔뜩 힘을 준다거나 무게를 더하는, 한국영화 캐릭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오류가 진호의 캐릭터에는 없다. 진호의 변화는 그를 둘러싼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전달될 뿐이지 그 자체가 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건 진호라는 캐릭터의 강한 매력이자, 명배우 황정민에게도 크나큰 변신의 계기다. ‘밥상수상’만큼이나 황정민을 수식하기에 딱 좋은 ‘연기파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만은 잠시 빼먹어도 좋다. 진호는 어느 모로 보나 배우 황정민의 정점, 최고의 연기라고 부르기에는 맞지 않지만, 그에게 참 잘 맞는 옷 같은 편안함에서는 확실히 이전까지의 캐릭터를 능가한다. 잔뜩 힘준 눈을 조금 편하게 뜨고, 강렬한 캐릭터의 선을 유연하게 구부리고 연기에 대한 부담의 무게를 십분 덜어내고 나면 남는 캐릭터가 바로 진호다. “늘 연기 안 한 듯한 연기가 뭐가 있을까, 그런 연기를 하자 고민했고 지금도 그게 제 숙제예요. 관객은 그냥 넘어가 주실지 몰라도 매번 저 스스로 연기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이 보여서 그게 싫었어요. 그런 과정들은 필요하겠지만, 그 과정들 이후에 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거죠.”

살인범을 쫓던 경성 추격신, 그는 <007>의 대니얼 크레이그처럼 좁은 슬레이트 지붕 위를 넘나들며 몸을 날린다. “대역이죠. 대역하시는 분이 참 잘하셨죠” 하고 금세 손사래를 치지만 꽤 많은 장면을 그는 대역없이 직접 연기를 하겠노라 제안해 주변의 걱정을 샀다. <검은집>에선 사실감을 살리고자 실제 칼을 잡더니, 이번엔 인력거를 타고 가다 내리꽂히는 아찔한 장면 역시 직접 해냈다.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하는 거예요. 대역을 쓰다보면 얼굴을 가려야 하고 그러면 화면상으로 보여주는 데 제약이 따르겠죠. 그러니 최대한 제가 하려고 해요.”

어느새 불혹,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그림자 살인>을 촬영하면서 그는 불혹의 나이가 됐다. “어느새 보니 내 나이가 참 많더라고요. 촬영장에서 가장 맏형이 됐더라고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황정민에게 나이 사십은 고등학생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저에게 사십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후하고 연기를 너무 잘하는 멋진 사람이었어요. 세상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그런 나이가 40이었죠. 그런데 막상 제가 40이 되니 아니더라고요. 불안하고 겁나요.”

삼십대 때 몰랐던 초조함이 지금의 그를 옭아매고 있음을 그는 솔직히 시인한다. “조급하죠. 그런데 지금까지 조급해하면서 왔기 때문에 이젠 좀 무던해지려고 해요.” 진호는 아마 그의 사십살 조급증을 느슨하게 완화해줄 훌륭한 백신이 돼줄 것이다. 그가 <그림자 살인>의 촬영을 끝내고 <웃음의 대학> 공연 때 진호의 의상을 몇 주간이나 빌려 입었던 건 아마 진호의 헐렁하고 구겨진 낡은 의상이 그의 몸에 편하게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만간 황정민은 이준익 감독의 신작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에서 이몽학과 함께 난을 일으키는 맹인 연기로 새로운 변신을 하겠지만, 언젠가 그의 바람처럼 진호가 시리즈물의 캐릭터로 남아 계속 이 낭만의 의상을 입어주는 것도 꽤 반갑고 즐거울 것 같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스타일리스트 최경아 헤어·메이크업 제니하우스 의상협찬 반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