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김명민] 김명민은 김명민이다

<파괴된 사나이>의 김명민

김명민이 강한 메소드 연기자인 건 익히 알려져 있다. 매 작품 그는 ‘자신’의 얼굴을 버리고 ‘인물’의 얼굴을 드러내보였다. 바다 한가운데서 수천명의 병사를 호령하던 이순신 장군(<불멸의 이순신>), 메스를 쥐고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 의사 장준혁(<하얀거탑>),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강마에(<베토벤 바이러스>),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루게릭병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하는 종우(<내 사랑 내 곁에>) 등 그가 맡은 많은 인물들에게서 ‘배우’ 김명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작품 속 인물이 되려고 노력했고, 또 빠져들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얼굴로 찾아왔다. <파괴된 사나이>에서 김명민이 맡은 역할은 납치된 딸을 애타게 찾는 아버지 주영수로, 유괴범과의 사투로 점점 파괴되어가는 인물이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는 주영수가 되었다. 역시 ‘김명민은 김명민이다’라고 할 만하다. 다음은 그로부터 들은 <파괴된 사나이>의 주영수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우 김명민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함께.

-아쉬움 (기자회견에서 김명민은 “이번 영화에서 내 연기에 큰 기대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 연기는 항상 아쉽다.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하기보다는 매번 아쉬운 느낌이 든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잘 나온 것 같지만 내 연기는 그만큼 안 나온 것 같고….

-숨어 있는 8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주영수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주목했다. 딸을 잃은 그는 신을 버리면서 세상 사람이 된다. 그런데 8년 뒤에 갑자기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봉인되어 있던 강한 부성애를 꺼내는, 그 감정의 변화가 극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특히 영화는 관객에게 8년간의 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그는 세상에 물들어갔을까. 영화에서 생략된 부분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다. 그런 것들을 유추해서 비하인드 스토리로 만들어야 했고, 또 상상해야 했다. 주영수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가 8년 동안 걸어간 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최초의 원칙 8년 뒤의 주영수의 모습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감독님의 경우 말끔한 슈트를 입은 냉정한 모습을 생각하셨다. 물론 냉정할 수 있겠지. 그러나 난 좀 달랐다. 딸이 납치된, 안 좋은 일을 겪은 사람이 잘될 리가 있겠나. 사업도 몇번 망했겠지. 그러면서 웬만한 일에는 의연할 수 있는 태도가 생겼을 것이다. 또 그래야만 했던 게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한번에 폭발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많이 이성적이기도 하고 불같기도 한 주영수를 만들고 싶었다. 또, 직업이 사업가잖나. 그것도 병원에 의료기계를 판매하는 영업직이다. 발로 많이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장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게 바로 지금 영화 속 주영수의 모습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떠올린 인물에 대한 최초의 이미지를 그대로 지켜나갔다. 반면 목사의 경우 접근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어릴 때 봐왔던 목사의 모습이 머릿속에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목사다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인물의 희로애락 목욕탕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느끼는 감정이 있다. 이게 찬물일까 아니면 더운물일까. 이를 알고 발을 담그는 건 재미없다. ‘이 안에 뭐가 있을까’, ‘발을 담그면 어떻게 될까’,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물에 들어갔을 때 뜨거운 물이든 찬물이든 그리고 미지근한 물이든 물이 내 살을 파고드는, 종아리와 허벅지에 올라오고, 이 가슴과 이 심장 안까지 가득 차고, 입과 코까지 들어와 숨을 못 쉬게 되는 감정은 각기 다르잖나. 그것들을 느끼고 싶다. 그런 감정을 주는 캐릭터를, 그리고 캐릭터를 넘어 무언가가 나를 마구 후벼 파고 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주영수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캐릭터를 보면서 내가, 이 김명민이라는 배우가 느끼는 건 참 크다. 뼛속이 저리고, 아프고, 웃기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이 사람 참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구나’ 하면서 애착이 확 온다. 정말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사람 뭘까. 왜 이렇게 됐을까. 이 사람.

-배우의 얼굴 실제 주영수라는 사람은 5일을 잠을 안 잔다. 나는 연기를 해야 하니 할 수 있는 건 3일이 최선이더라. 영화의 후반부, PC방신은 3일을 밤새우고 찍은 거다. 배우의 얼굴이 가치가 있을 때는 예쁘고 멋지게 보일 때가 아니다. 그 인물에 빠져 있을 때 가장 가치가 있다. 주영수는 점점 망가지고 있는데 배우는 멀쩡하고 윤기있는 얼굴로 나오면 그게 배우로서 과연 할 수 있는 일일까. 그건 아니다.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그 사람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한다. 주영수는 딸을 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추적해야 하고, 당장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단서를 찾았잖아. 그놈이 좋아하는 것으로 떡밥을 풀잖아. 밤낚시하는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본 적 있나? 언제 물지 모르는 미끼를 보면서 잠을 못 자잖아. 주영수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냥 다크서클 분장하고 피곤한 척하면서 연기할 수 있겠지. 흉내낼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건 그저 기술일 뿐이다. 그걸 관객이 받아들일까? 바로 앞에 있는 스탭들조차 속이지 못하는데?

- 대사, 행동보다 중요한 건 눈이라고 생각한다. 진실한 감정은 눈에서 가장 먼저 표현된다. 연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해야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장막을 뚫고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 그걸 눈이 한다. 눈의 깜빡거림, 작은 흔들림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김명민 그동안 신인감독이나 두세 작품을 연출한 감독들과 작업했다.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 등 실력있는 감독들의 영화에 일부러 출연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감독님들이 안 불러주셨다. (웃음) 불러주신다고 해도 무조건 “오케이”할 건 아니지만. 물론 감독님들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있다. 그래도 시나리오를 봐야지. 그 인물로 ‘배우 김명민이 몇 개월 희생하고 살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출연할 거다. 예전보다 ‘감독이 누구인가’를 많이 고려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전에는 시나리오 위주로 봤다면 지금은 감독을 많이 보게 됐다. 어쨌거나 불러주면 감사하지.

-드라마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영화들 드라마는 딱 33.3%씩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가, 배우, 감독, 세명이 각자의 몫을 해냈을 때 빛을 발한다. <하얀거탑>이 그런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영화는 다르다. 배우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연기를 해도 후반작업에서 감독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게 영화다. 나도 그런 고심을 많이 한다. (시나리오와 달라진 결과물을 볼 때 아쉽지 않나, 라는 질문에)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끝내야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

-연기가 연출을 압도? <내 사랑 내 곁에> 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감독의 연출이 배우의 연기를 못 따라간다, 활용을 잘 못한다.’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런 연기를 뽑아내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다. 나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아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연기는 괜찮은데 작품이 이상하다’ 그러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물론 그런 건 있다. 두세달간의 후반작업은 배우들이 참여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실망스러운 건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배우들이 경험해봤을 것이다.

-스릴러나 범죄 장르 선호? 현재 우리나라 영화 시나리오의 90%가 스릴러다. 이는 가장 많은 남자배우들이, 굵직굵직한 남자배우들이 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또 주인공 대부분의 삶이 기구하다. 솔직히 나도 로맨틱코미디를 하고 싶다. 휴 그랜트가 나오는 정통 로맨틱코미디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없다. 대부분이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코미디뿐이다. 억지스러운 감정을 쥐어짜는 영화들 말이다. 장르가 스릴러든 로맨틱코미디든 캐릭터가 평범하든 세든 그건 의미가 없다. 세면 얼마나 세겠나. 평범하면 또 얼마나 평범하겠나. 분명한 건 모든 캐릭터가 연기하는 데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는 넘쳐서는 안된다는 것. 무엇보다 내가 맡은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

-즉흥연기 즉흥연기를 하게 되면 자연인 김명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제일 싫은 게 극중에서 배우 김명민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호흡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이 신은 네가 따먹어야 해”다. 어디 영화 보러 갔는데 누군가가 ‘그 신은 누가 잘 따먹더라고요’라고 한다. 뭘 따먹어? 어떤 신에서 어떤 배우가 따먹었다는 것은 배우들의 호흡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인배우가 긴장을 많이 해서 자신이 가진 기량의 반밖에 보여주지 못했어. 그건 나한테도 마이너스다. 후배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현장에서 내 역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전쟁터에 함께 나가는 전우이기 때문이다.

-차기작 김탁환 작가의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한 <조선 명탐정 정약용>(연출 김석윤)으로 선택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을 재해석한 게 새로웠다. 남들은 코미디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물론 정약용이 실수도 하고 그러지만, 웃기려는 게 목적이 아니다. 기존의 영화와 다를 거다. 가볍다기보다 밝은 영화라고 보면 된다. 독립영화에 출연? 시나리오만 좋다면 할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건 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될 것 같진 않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귀기울일 것이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