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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이 남자의 발화점
김용언 사진 오계옥 2010-07-19

무주 숙소에서 촬영장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왕복 2차선 한쪽으로는 물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는 숲이 우거졌다. 굽이굽이 그 길 따라 30분 정도 달리면 좌회전하는 지점이 나온다. 일방통행, 흙밖에 없는 언덕을 10분 정도 더 달리니 <이끼> 촬영장이 나왔다. 마을 전체를 굽어보는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천용덕 이장의 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매일 그 길을 가는 기분이 그렇게 상쾌하고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웃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기분이었다. 해국이라는 역할과 나의 상황이 어느 정도 비슷했던, 굉장히 전투적인 촬영이었다.”

“<이끼>가 미쳐버릴 정도로 힘들었다”는 건 엄살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육체적 고통이 극심했다. 촬영 들어가기 직전, 신종플루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박해일은 평소 잘 걸리지 않던 독감 기운을 느꼈다. 혹시나 해서 검사를 받아봤지만 신종플루는 아니었다. 안심했지만, 바로 직후 첫 번째 촬영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전석만(김상호)과 유해국(박해일)이 지하굴을 두고 대립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이 지점부터 영화는 제대로 ‘끓기’ 시작한다. 해국이 처한 상황이 말 그대로 죽음의 위협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발화점인 것이다. 이 장면만 1주일 동안 찍었다는 박해일은 감기가 미처 낫지 않은 채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절벽에 발끝을 걸치고 땀과 피와 흙 범벅이 되어야 했다. 그러고 나자 온몸에 붉은 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결국 병원에서 처방받은 한달치 피부과 약으로 촬영을 버텼다. “독한 피부약 덕분에 붉은 기는 사라졌지만, 위와 간도 안 좋아지고 무기력증에 우울증까지 수시로 덮쳐왔다. 해국의 상황 자체가 완전히 맛이 가는 상황이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이 나름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웃음)”

어쩌면 육체적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중압감과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원작자 윤태호 작가부터 해국의 캐릭터를 잡아나가다 막히는 순간,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이원상을 떠올렸다고 했다. 박해일이 연기한 캐릭터로부터 <이끼>의 해국이 등장했고, 윤태호 작가의 세계를 각본가 정지우 감독과 연출자 강우석 감독이 또다시 재배치하여 다른 색깔의 해국이 태어났다. 이제 박해일은 자신이 예전에 연기했던 어떤 이미지에 스며들거나 혹은 싸우면서 자신만의 해국을 만들어내야 했다. “사실 그 점 때문에 <이끼>를 선택한 게 과연 나한테 유리한 지점일까 물음표를 떠올렸다. 해국이라는 인물의 표피가 그렇게 바뀌면서 나한테까지 왔는데, 그렇다면 내가 연기할 해국은 윤 작가님의 것인가, 강 감독님의 것인가, 정 감독님의 것인가 혼동되는 시간이 왔다. 결국엔 지금까지 명확하게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온 강우석 감독님 스타일로 가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해국이 나올까, 나 스스로도 궁금했다.”

영화 속 해국과 원작 속 해국은 분명 다르다. 영화 속 해국은 목표를 향해 좀더 직설적이고 뚜렷하게 움직인다. 게다가 해국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 천용덕 이장과 석만, 덕천, 성규, 영지 등은 하나같이 속내를 감추고 있고 천연덕스럽게 뒤통수를 치며 매 순간 해국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불가해한 존재들이다. 해국은 장면마다 이들 하나하나와 맞닥뜨리고 대결해야 한다. 그는 훨씬 강하고 고집스럽다. “해국이 박민욱 검사와 함께 마을로 돌아와서 이장과 마주쳤을 때, 내 생각엔 해국이 어쨌든 마을 사람들의 죽음에 개입돼 있기 때문에 겁이 났을 것 같았다. 이장과 눈도 마주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강우석 감독님은 무조건 기운있는 모습으로 가자고 했다. 그게 해국이라고. 계속 심판의 개념으로 가야 한다고.” 캐릭터가 영화적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묻혀가길 원하는 게 강우석 감독의 스타일이고, 박해일은 원작과 똑같을 필요가 없는 영화 <이끼>에서 그 판단이 맞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끼>에서 해국에게 미세한 망설임과 흔들림을 새겨넣은 것은 온전히 박해일의 힘이다. “제가 이곳에 있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툭 던질 때,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과도한 정중함이 살짝 어긋나며 희미한 도발의 기운을 뿜어낼 때, 수다스러운 덕천과 의뭉스러운 석만과 공격적인 성규와 미스터리어스한 영지와 가장 낯설고 두려운 이장을 마주할 때 각기 미묘하게 달라지는 표정의 대응까지. 빠르고 굵은 이야기 전개 속에 자칫 전형화될 수 있는 해국의 존재감을 살리는 건 박해일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 덕분이다. 박해일은 얼마 전 조성희 감독의 데뷔작 <짐승의 끝>을 끝냈고, 곧 윤재근 감독의 데뷔작 <대결>(가제) 촬영에 들어갈 참이다. “낯설고 새로운 감각과 상황으로 계속 밀고 나가는, 초반부터 어떤 영화겠구나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스타일”의 <짐승의 끝>, 그리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대결하게 되는 상황을 그린 드라마” <대결>(가제)은 <이끼>라는 거대한 도전을 마친 그가 다시 한번, 그리고 언제나처럼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역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출사표다. 이 배우, 참 대충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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