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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위해 별짓을 다한다

소설 <7년의 밤>의 작가 정유정

정유정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어느 영화인의 트위터에서였다. 그는 정 작가의 신작 <7년의 밤>을 영화로 보고 싶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정유정 작가의 이름을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자주 만났다. 영화감독, 배우, 프로듀서 따질 것 없이 모두가 <7년의 밤>의 매혹을 이야기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시각적으로 가장 예민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았는지 궁금했다. 소설을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무엇보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인물의 매력이 굉장했다. 독자로 하여금 댐 수문을 열어 마을 전체를 수몰시키고 자기 아내와 어린 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죽인 주인공 살인마를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7년의 밤>으로 그걸 가능케 한 정유정 작가는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신예 작가다. 장르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일반 독자들의 시선까지 사로잡는 그녀의 소설은, 한국 문단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기대하게 한다. 바깥 외출을 싫어해 광주의 집에서만 지낸다는 정유정 작가를 인터뷰차 서울의 출판사 건물에서 만났다.

-<7년의 밤>에 대한 반응이 대단하다. 인기를 실감하나. =내가 골방 체질이다. 광주에 사는데, 외출도 잘 안 하고 집에만 있다보니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서울에 인터뷰하러 올라오면 좀 느낀다. (웃음)

-전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는 각각 세계청소년문학상(1회), 세계문학상(5회) 수상작이었다. 문학 공모전이 아닌 첫 작품을 집필하는 마음이 어땠나. =이전에는 확실히 문단에 등단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장르적인 본성을 억누르면서 작업했었다. <내 심장을 쏴라>의 경우 다 쓴 소설을 두번 폐기하고 세번을 썼다. 말하자면 (문학 공모전이 원하는) 틀 안에 넣으려고 애를 쓴 건데, <7년의 밤>을 쓰면서는 그런 제약이 없겠다 생각하니 갈 때까지 가보자 하고 본성대로 지른 거지. 3개월 만에 초고 2천매를 쫙 쓰고 나니 즐거웠다.

-초고는 3개월 만에 나왔는데, 왜 집필 기간이 2년이나 걸렸나. =내 스타일이 그렇다. 퇴고를 많이 하는 편이다. 말이 되든 말든 초고는 ‘막 질러서’ 3개월 안에 쓰고, 나머지 기간엔 껍질을 벗기듯 열다섯번 정도를 고친다. 필요한 자료도 보충하고. 나는 초고에서 구상한 장면이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남아 있으면 실패라고 본다. 왜냐하면 난 이야기의 천재가 아니니, 처음 생각하는 건 당연히 클리셰일 수밖에 없다. <7년의 밤>은 2천매가 되다보니 여덟번 고치고 출판사에 넘겼다. 보통 때보다 여섯번 정도 덜 고친 건데, 되게 불안하더라. (웃음)

-<7년의 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떤 책에서 이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작가들은 평생에 걸쳐서 한두 가지, 혹은 세 가지 테마를 가지고 그걸 변주하며 글을 쓴다고. 내게는 그 테마가 ‘자유의지’다. 나는 자유의지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지켜야 할 두 가지 ‘무엇’이라고 본다. 첫 번째는 인생에서 한 사람이 지켜야 할 무엇, 두 번째는 그 지켜야 할 무엇을 위해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무엇.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가 자유의지의 발현에 대한 얘기였다면 <내 심장을 쏴라>는 자유의지의 구현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었다. 다음 작품으로 이 테마를 매듭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인간에게서 모든 걸 빼앗고 구속시켰을 때, 직업도 잃고 도덕성도 잃고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 처했을 때, 그가 끝까지 자기 운명과 드잡이질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피해자의 아버지가 겨눈 복수의 칼날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하는 이야기’를 최초로 떠올렸다. 이 ‘별짓’에 대해 쓰자고 결심했다.

-고백하건대 <7년의 밤>을 다 읽은 뒤 악몽을 꿨다. 죽은 아이(오세령)가 물속에 잠겨 있는 소설 속 장면이 꿈에 그대로 나오더라.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얘기다. 작업을 할 때는 어떤가. 이미지를 떠올리며 소설을 쓰는 편인가. =악몽을 꿨나. 나도 세령이 꿈을 많이 꿨다. 유리창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나와 눈 마주치고…. 장면을 만들 때면 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정말 못 그려서 초등학생 수준인데도 스케치북 한권을 금세 다 쓴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거기에 글을 입히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굉장히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작업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납득이 된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구상한 다음 그 가상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글을 쓴다. 마치 영화 시퀀스를 쓰는 것처럼.

-혹시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있었나. =이미지라기보다는 어떤 정서가 있었다. <7년의 밤>을 쓰는 내내 고딕 메탈 음악을 들었다. 고딕 메탈이 되게 살벌하다. 노래는 조용한데 늑대 울음소리가 나오고, 가사는 음산하고. 아마 그런 음악을 많이 들어서 소설도 음산해진 게 아닌가 싶다. 나이트 위시의 <Sleeping Sun>과 에피카의 <Cry for the Moon>을 질리게 들었다. 특히 <Cry for the Moon>은 살인범 최현수의 테마곡이었다.

-취재를 열심히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내 심장을 쏴라>의 경우 정신병자인 주인공을 그리기 위해 직접 정신병동에서 생활했다고 들었다. <7년의 밤> 또한 작품의 배경이 되는 댐 유역 마을이나 등장인물의 스쿠버다이빙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취재 과정을 듣고 싶다. =남편이 119 구조대원이라 김명곤 잠수교관님을 소개시켜줬다. 그분 말씀을 못 알아들을까봐 미리 잠수 매뉴얼부터 의학에 관한 책까지 잠수에 대한 책 일곱권을 사서 공부를 했고, 만나서는 외국 훈련이나 구조 경험을 들었다. 주인공이 댐 수문을 열어 한 마을을 수몰시키는 살인마이다 보니, 정운기 토목시공기술사님의 도움도 받았다. 내가 숫자치라 몇분이면 마을이 수몰되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굉장히 헛갈리고 걱정이 됐는데 그분이 자세히 알려주셨다. 마지막으로 토목시공기술사님의 소개로 댐 운영관리팀을 찾아가 신나게 취재했다. 나중에 팀장님이 소설 결말을 물으시기에 ‘댐이 열려 마을을 쓸어버리는 이야기’라 했더니 ‘헉’ 하시며 “우리가 도와줬다고 하면 안돼요” 하시더라. (웃음) 댐 운영팀에서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니까. 그래서 후기에 이니셜로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7년의 밤>의 주인공 최현수는 살인범인 동시에 순수하고 유약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에 등장하는 순정파이자 살인범인 무스 맬로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안녕, 내 사랑>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챈들러는 스티븐 킹과 더불어 내가 많이 연구하고 존경하며 받들고 사는 작가다. 챈들러에게선 스타일과 문체를, 스티븐 킹에게선 이야기 구성력을 배웠다. 너무 좋아해서 작품을 쓸 때마다 챈들러 이름을 슬쩍슬쩍 등장시키잖나. (웃음) 챈들러나 스티븐 킹의 작품이 그렇듯, 인간의 양면적인 모습을 다루는 데 관심이 많다. 한쪽은 어둠, 한쪽은 빛. 한쪽에 천사, 한쪽에 악마. 한쪽은 카오스, 한쪽은 코스모스. 내 마음만 들여다봐도 그런 불안정하고 충동적이고, 영원히 완성될 것 같지 않은 괴상한 게 들어앉아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양면성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전작부터 작가의 후기에 늘 등장하는 오승환씨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이번 소설에서는 아예 동명의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살인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고, 살인마가 된 아버지와 홀로 남겨진 아들을 끝까지 보살피는 주요 인물이다. =고향 후배다.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의 시나리오작가다. 내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언제나 가장 먼저 모니터링을 해주는 친구다. 평가가 어느 정도로 신랄하냐면, 나는 맨 주먹으로 링 위에 올라가는데 자기는 망치 들고 올라와서 두들겨패는 스타일이다. 이번엔 주요 등장인물로 출연시켜서 덜 욕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웃음) 시나리오 쓰는 친구라서 서사에 대해 굉장히 엄격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장편은 진창이다, 독자들이 이 진창에폭 빠져서 뒹굴고 헤엄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친구는 진창이든 나발이든 마스터 플롯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내가 삼천포로 샐 때마다 이 친구가 빨간 펜 들고 원고에 돼지꼬랑지를 그리는 거지. 아니꼬워도 할 수 없다. (웃음) 내 서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지켜봐주는 울타리 같은 친구니까.

-글이 안 풀릴 때는 어떻게 하나. =술을 마시지. (웃음) 예전에는 샌드백을 쳤다.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을 때, 소설에만 매달리니 몸이 아팠고 수술을 받았다. 집 밖에 나가는 걸 원체 싫어해 남편에게 집에 샌드백을 달아달라고 해서 치고 그랬다. 그걸 한 7년 정도 하다가, <내 심장을 쏴라>를 쓸 때 주인공이 시력을 잃어가니 유사 실명경험을 하겠다고 뒷산으로 야간 산행을 나갔다. 플래시도 일행도 없이 혼자서. 처음엔 굉장히 무서웠는데 3년을 하다보니 습관이 됐다. 산에 올라가며 내일 아침에 어떤 글을 쓸까 생각한다. 안 풀리던 부분이 산에 다녀오면 풀릴 때가 많다. 내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일 시작하고, 밤 9시에 잠들기 때문에 생활 패턴과도 잘 맞는다.

-등단하기 전 간호사, 의료보험심사평가단 직원으로 일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의대를 보내고 싶어 하셨다. 초등학교도 여섯살에 갔다. 당시 의대가 6년 과정이었는데, 남들이랑 같이 졸업하라고 2년 빨리 학교에 보낸 거다. 어머니가 그 정도로 극성이었으니 글짓기대회 가서 일등하고 상 받아와도 꼼짝없이 이과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이 잘 안 나와 간호대학에 갔는데, 간호사로 취직만 하면 돈 벌어서 바로 야간 국문과에 다닐 생각을 했다. 그때 어머니가 간암에 걸리셨다. 내가 일하던 중환자실에서 3년간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동생들 대학 등록금 대고, 아버지와 힘 합쳐 빚 청산을 하다보니 20대가 훌쩍 가버렸다. 당시엔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소설 쓰는 데에는 그때의 경험이 큰 재산이 되는 것 같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 쓴 첫 후기에서는 도전해보고 싶은 두개의 종탑- 신나는 모험, 겁나는 스릴러- 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꿈꾸는 궁극의 이야기가 있다. 찰스 디킨스처럼 독자를 울리고 웃기고, 주인공의 안위를 걱정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그러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고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다음 작품 계획이 있나.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얘기를 구상 중이다. 동물이 사람에게 옮기는 전염병으로, 소설에선 개가 감염체로 등장할 예정이다. 개 심리학, 해부학, 수의학 책 등을 보며 자료조사를 하고 있다. 한 작품을 마치고 다음 작품을 시작하려 모니터 앞에 앉으면 도로 제자리인 것만 같다. 알래스카 설원에서 꽃삽 하나 들고 얼어붙은 땅 파서 도시 건설해야 하는 느낌? (웃음) 다음엔 꽃삽이 아니라 기중기였으면 좋겠는데, 역시 또 꽃삽이고. (웃음) 그런 심정일 때가 많다. 그럼 벽에다 머리 찧고 혼자 술 먹는 거지.

-<7년의 밤>은 영화화 논의 중이다. 어떤 장면이 가장 기대되나. =죽은 아이(세령)와 가해자의 아이(서원)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클라이맥스 장면. 이건 처음 말하는 건데, 꿈에서 세령이와 밤새도록 그 놀이를 했고 새벽에 깨자마자 써내려간 장면이다. 오싹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적인 영상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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