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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오늘은 SF] 한국판 '블랙 미러'라는 야심
이경희(SF 작가) 2022-05-26

<블랙미러>

온 국민이 사랑하는 영국 왕실의 공주 수잔나가 납치되고, 납치범은 수상에게 생방송으로 돼지와 성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2011년 방영된 <블랙 미러> 시리즈의 첫 에피소드 <공주와 돼지>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로그라인이다. 평생을 왕실 없이 살아온 한국인의 정서로는 ‘그래서 왕족이 뭐?’ 싶지만, 어쨌든 공주 납치 사건은 순식간에 영국 전역을 혼란에 빠뜨리고 수상은 돼지와 성관계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짜고 또 쥐어짠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정작 돼지의 입장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상황의 폭력성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재밋거리로 전락해 보는 이의 불안과 긴장은 증폭된다. 뭐, 대충 이런 분위기다.

근미래. 첨단 기술. 사회 풍자. 독한 설정. 영국식 블랙 유머. 옴니버스. <블랙 미러>의 컨셉을 한줄로 요약해 설명하자면 대충 이 정도 키워드를 꼽을 수 있겠다. <환상특급>류의 기묘한 이야기 계보를 이어받은 시리즈답게,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 역시 대부분 뾰족한 하이 컨셉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이번에 영국에서 나온 신작 드라마 진짜 재미있어요.’ ‘그래요? 무슨 내용인데요?’ ‘그게, 납치범이 영국 수상한테 돼지랑….’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뜻이다. <블랙 미러>는 전통적인 빌드업 과정을 거쳐 매끄럽게 기승전결을 완성하기보다는 충격적인 하나의 상황, 흥미로운 한 가지 설정을 중심으로 뻔뻔하고 속도감 있게 스토리를 밀어붙인다. 앞서 한줄 요약을 듣고 흥미를 느꼈다면 아마 해당 에피소드를 즐겁게 감상할 가능성이 높다.왜냐하면 그게 이야기의 거의 전부니까. 이야기 말미에 더 독한 반전이 하나둘 정도 추가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물론 이 시리즈가 독한 설정만으로 주목받아온 것은 아니다.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들이 뿜어대는 독기는 대부분 영국 사회, 혹은 현대 기술 문명의 삐걱거림 속에서 추출된 화합물이다. 작품들이 제시하는 SF 설정들 역시 논리적으로 그럴싸하다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장되어 있고, 현실을 풍자하는 우화로 충실히 조율되어 있다.

일종의 서바이벌 TV쇼 이야기인 <핫 샷>은 영국 사회의 계층구조와 미디어 환경을 거의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이고, 증강현실 시스템에 조종당하는 군인 이야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미군과 나치 독일을 겹쳐 둘을 한번에 비꼬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시리즈 최고 인기 에피소드 중 하나인 <USS 칼리스터>는 가상현실 속 인공지능의 권리 문제나 영상 콘텐츠 업계의 백인 중심주의에 대한 비난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경고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뾰족한 고민들을 작품에 잘 녹이고 있다보니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 같은 제목의 책도 나오는 모양인데, 참 부럽다.

개인적으로 <블랙 미러>가 SF로서 흥미로웠던 점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단막극이라는 기본 세팅 자체였다. 이런 조건값을 통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과 리스크를 들여 더 독하고 파격적인 SF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한국판 <블랙 미러>’를 제작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분들의 소식을 자주 듣곤 한다. 그 변형으로는 한국판 ‘러브, 데스+로봇’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실제로 비슷한 기획이 진행되어 성공적으로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했다. 웨이브와 MBC에서 방영된 앤솔러지 시리즈 <SF8> 말이다.

<SF8>은 상대적으로 조금 느슨한 컨셉으로 꾸려진 8편의 옴니버스 시리즈다. <블랙 미러>처럼 독하고 뾰족하진 않지만, 적당히 무거운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근미래 SF 모음집이랄까. 그중 7편의 작품이 국내 SF소설가들의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된 터라 더욱 각별하기도 하다. 작품들의 면면을 뜯어보아도 흥미로운 스토리와 익히 들어온 배우들, 연출자들의 이름이 눈에 띄어 기대감을 부풀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청률은 기대만큼 따라주진 못했다.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리즈의 실패가 그저 작품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영상 콘텐츠 시장에서 SF라는 장르가 아직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창작자들에게도, 그 창작물의 소비자들에게도 SF는 아직 충분히 익숙한 장르는 아닌 것이다. 처음 만들어보는 입장에서 느끼는 묘한 어색함. 그리고 보는 이 역시 어색해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살짝씩 덧붙이는 연출상의 미묘한 친절들이 모여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부산행>의 성공 이후 누구도 좀비 이야기를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시장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일은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는 행위와 비슷한 것 같다. 언제, 누구의 차례에 잭팟이 터질지 모르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꾸준히 돈을 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사이 장르의 재미에 젖어들게 되는 시점까지. 물론 변명일 수도 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단숨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뽑아낸다면 익숙지 않은 장르에서도 훌륭한 흥행 성적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오징어 게임> 같은 성취를 거두길 바라는 건 조금 과한 기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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