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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인의 데구루루] 긴장과 이완 사이
김세인 2023-07-27

‘보통 어디서 작업하세요?’ 누구를 만나든 날씨 이야기와 함께 꼭 나누는 질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으로 일하는가. 예전에는 나만 모르는 작가들의 비밀이 있을 것 같아 미어캣처럼 둘러봤다면 지금은 안다. 그게 그거인 것을. 다만 내 몸이 원하는 장소와 방법이 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잊었던 선택지를 발견하기 위해 질문을 꺼내놓고는 한다. 한 가지의 공간과 방식, 도구에 탑승해 글을 쓰다가 그것들의 힘이 떨어지면 다시 다른 것들로 옮겨 탑승해 달리는 거다. 그래서 나는 지난 <씨네21>의 ‘LIST’ 코너에서 언급했듯이 <민음사TV>의 ‘문박싱’, <오지은 임이랑의 무슨 얘기>의 홈쇼핑st편을 좋아한다(홈쇼핑st 말고도 언니들의 이야기는 다 좋아한다!!). 물론 <씨네21>의 ‘LIST’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갖는 일할 때 곁에 두는 도구에 대한 애정을 듣다 보면 강력한 희망과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저 구글 시계가 내 책상 위에 있다면! 저 차를 마시면! 저 비타민 젤리를 먹으면! 저 투명 아크릴 독서대에 책을 올려놓으면! 갑자기 온 우주의 기운이 내 머리와 손에 깃들어 끝내주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믿음! 요즘은 <월간 채널예스> 2023년 6월호에 실린 ‘젊은 작가 특집’ 인터뷰를 읽고 있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어떤 루틴과 어떤 것으로 글을 쓰는지 보다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그래 글은 척추의 힘으로. 끄덕끄덕. 이상한 마음으로. 끄덕끄덕.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맑은 정신으로. 끄덕끄덕. 두달 전에 니시카와 미와 감독님에게 시나리오 쓰기 비법을 물었다.

‘감독님의 시나리오 잘 쓰는 비법은 무엇입니까?’

‘맥주요.’

‘어! 저도 맥주요. 그렇지만 요즘은 맥주를 마시면 결국 쓰지 못해서

정말 글을 쓰는 날에는 맥주를 마시지 않아요.’

‘아 많이 마시면 저도 쓰지 못해요! 그래서 맥주 한잔이요.’

‘아 한잔.’

대충 이런 대화. 그래. 한잔. 끄덕끄덕.

*

지금까지는 집에서 글을 썼다. 나는 평소에도, 글을 쓸 때에도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다. 어떨 때는 내가 쓰는 글 한 글자 한 글자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내가 써도 될지,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막막해져서 머리가 뱅뱅 돌 때가 있는데 그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식탁 의자, 소파에서 주변을 둘러보곤 한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휴지 뭉치, 벽에 기대 있는 건조대, 때 묻은 콘센트, 벽에 나 있는 어젯밤에 잡은 모기 흔적, 내 허벅지에 기대 하품하는 고양이들. 그런 것들을 보다 보면 글을 쓰는 것이 거대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옆집 꼬마처럼 아주 친근하게 느껴진다. 골목 어귀에서 들리는 동네 꼬마들의 메아리. 그쯤으로 여겨져 마냥 즐겁게, 그렇게 쓰게 된다. 글쓰기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이 아닌 구체적인 하루, 하루로 다가온다.

그런데 요즘 그 연료가 바닥나버리고 말았다. 무더워진 날씨 탓에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축축 늘어지는 고양이들처럼 만사 지겨워졌다. 부끄럽다. 나는 사실 요즘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는 생활에 대해 연재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쓰고 싶은 것은 있지만 잠시 뜸을 들인다는 것이 글로 옮기는 때를 약간 지나버린 것 같다. 그래서 옮겨보기로 했다. 공간을. 나는 내일 떠난다. 오키나와로.

특별히 오키나와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어디 있겠냐마는 이 이야기는 나에게 특별히 더 중요하다. 사실 집과는 성질이 맞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는 동네 어귀에 있는 꼬마들의 목소리가 아니다. 나는 좀더 우렁차고 낯설고 사나운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옮겨보기로 했다. 공간을. 이건, 오키나와로 글을 쓰러 가는 건 나에게는 굉장한 야심의 행동이다. 콩알만 한 심장을 갖고 있는 나는 그래서 그런지 며칠 전부터 몸이 아프다. 무척 긴장 상태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가서 아무것도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 기껏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쓰면 어떡하지? 걱정스럽다. 그렇지만 쓰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이 영화가 뭔지. 나에게 생생하다가도 흐릿해지는 이 영화, 상상해 보면 눈물이 찔끔 나다가도 하품나는 그 사람. 과연 누굴까. 만나고 싶다. 그래서 몸살 약을 잔뜩 챙겨본다. 이 긴장의 몸살을 겪어내면 조금은 대범해지겠지. 나는 실험체가 되어 나에게 맞는, 영화에 맞는 방식과 도구를 마구 겪어내고 싶다. 갖가지의 방법을 마구 폭식하고 싶다. 알고 싶다. 나의 영화는 뭔지. 나는 어떤 작가인지.

이번 ‘데구루루’ 글을 쓰며 내가 작업할 때 필요한 물건들에 대해 산뜻하게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작업할 때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나는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로 처음 장기 여행을 갔는데 그때에도 출발 20분 전에 급하게 캐리어를 채워 출발했다. 그 후로 언제나 출발하기 30분 전에 이것저것 캐리어에 때려 박고 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제 오키나와로 출발하기 7시간 전인데 아무래도 짐은 자고 일어나서 싸야겠다. 출장을 가면 달라진 환경과 긴장 때문에 항상 감기약과 함께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내 몸이 버텨주어야 할 텐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 떠오르는 캐리어 안에 넣을 것은 몸살 약, 홍삼, 알레르기 약, 괄사 마사지, 오일, 풀향 룸스프레이…. 아무래도 나에게 필요한 건 경직되지 않는 몸, 움츠러들지 않는 몸인 것 같다.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몸을 갖고 싶다. 더이상 집에 숨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느끼는 근육통만큼 더 많은 영화를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는 이동한다. 오키나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