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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푸근한 낭만극

<참 좋은 시절>을 할머니와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

KBS2 드라마 <참 좋은 시절>.

열여섯살 무렵까지는 할머니 방에서 드라마를 봤다. SBS <옥이이모>, KBS <서울뚝배기>, MBC <사랑이 뭐길래>처럼 시골 동네가, 오만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가족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노년에 고향을 떠나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함께 낯선 도시의 좁은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되신 할머니는 TV 속의 사람 구경을 좋아하셨다. 야물딱지게 사투리를 쓰는 꼬맹이들의 논두렁 등하굣길도, 고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던 아가씨가 드디어 착한 짝을 만나 시집가는 날도,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 벌면서도 허풍에 배가 터지던 사내들이 술에 취해 골목길을 비틀대며 신세한탄하는 모습도 할머니의 옆자리에서 봤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실 줄 알았더라면 좀더 많은 걸 함께 보고 이야기했을 텐데, 그때 내 나이의 두배가 되고서도 아직 후회한다. 아니,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다면 지금 재밌게 할 수 있는 얘기가 더 많을 텐데, 그게 아쉽다. 요즘 KBS의 <참 좋은 시절>을 보면서도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할머니랑 같이 보면 좋을 텐데.

어찌 보면 고리타분한 이야기다. 지겨운 가난과 답답한 부모 형제를 떠나 서울 가서 검사가 된 동석(이서진)이 15년 만에 고향 경주로 발령받아 금의환향한다. 대도시와 달리 휑한 시가지에는 그의 귀향을 축하하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주세요”라고 ‘주민 일동’이 내건 현수막이 펄럭이지만, 정작 동석이 마주한 것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 없이 각자 사고치느라 바쁜 가족들이다. 입만 살고 철없는 형 동탁(류승수)과 욱하는 성미로 유치장을 들락대는 동생 동희(옥택연), 어린 시절 사고로 정신적 성장이 멈춰버린 쌍둥이 누나 동옥(김지호), 사고 때 자신을 구하다 허리를 다쳐 십수년째 자리보전하고 있는 할아버지(오현경)까지 그대로다. 하나 바뀐 게 있다면, 고등학생 때 자신을 열렬히 사모했던 지역 유지 딸 해원(김희선)의 집이 망해버렸고 해원 역시 물정 모르는 공주님에서 억척스런 대부업체 직원으로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냉철한 형과 다혈질 동생의 대립, 장애가 있지만 순수한 여성캐릭터, 부잣집 딸과 고용인 아들의 로맨스는 이경희 작가가 2000년에 집필했던 KBS 드라마 <꼭지>와 큰 틀에서 상당히 닮아 있다. ‘개천에서 난 용’인 주인공의 가족들이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게 된다는 면에서는 MBC <그대 그리고 나>를 비롯해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서민 가족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난봉꾼 가장이 비워놓은 집에서 본처와 첩이 사이좋게 형님동생하며 살림을 꾸려간다는 설정을 비롯해 <참 좋은 시절>의 전반적인 정서는 2014년 현재라기보다는 먼 과거, ‘참 좋았던’ 언젠가에 속해 있다.

그러나 악역조차 ‘못난 놈’이긴 하되 ‘나쁜 놈’처럼은 그리지 않고, 인물과 관계를 통해 재미를 주면서 감정을 증폭시키는 이경희 작가의 특기는 오랜만의 가족 드라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집 나간 난봉꾼 남편 대신 배다른 자식 키우랴 반신불수 시아버지 모시랴 어미 없는 손주들 기르랴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착하다 못해 미련하고 답답해 보이는 동석의 모친 장소심 역을 맡은 윤여정의 연기는 작품의 무게중심을 딱 잡아준다. “이 두분 농약 안 쓴 콩으루다 쑨 거 맞쥬? 확실허쥬?”처럼 간단한 대사도 그의 입을 통해 들으면 곱씹을수록 고소함이 느껴질 정도다. 시골 동네의, 오만 시끌벅적한 남의 가족 이야기를 보는 맛이란 이런 데 있다. 단지 나이가 들어서 이런 이야기가 좋아진 건 아니냐고 한대도 할 말은 없지만, 그 남의 가족이 행복해지는 모습까지 보고 싶은 게 늘 있는 경우는 아니라니까.

+ α

아껴 보고 싶은 순간

경주의 고분을 배경으로 시작해 골목 안 꼬마, 강아지를 등에 업은 할머니, 연탄 트럭과 구멍가게 등 정겨운 모습이나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을 매회 새롭게 담아내는 오프닝 영상. KBS <드라마 스페셜-보통의 연애>에 이어 공간과 사람에 대한 김진원 감독의 애정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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