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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일리 있는 한눈팔이

<일리 있는 사랑>의 엉뚱한 권태극복기에 시선이 간다

민방위 사이렌에 발이 묶인 18살 여고생과 28살 남자가 얼떨결에 분식집에 마주 앉았다. 부모에게 속아 병원에 끌려갔던 기억, 흔들리는 이를 뽑혔던 유년기 추억담을 주고받던 중, 남자는 입가에 떡볶이 국물을 묻히고 재잘대는 여고생의 말에 순간 얼이 빠졌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막 때렸잖아요. 그러고는 아빠랑 같이 뽑은 이를 지붕 위에 올렸더니 다음날 아무리 흔들어도 아버지가 안 일어나시는 거예요. 돌아가신 거죠.” 동생 몫으로 포장한 떡볶이를 챙긴 여고생은 말을 잇는다. “위암이었거든요. 난 또 내가 때려서 못 일어나시는 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훈련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쏜살같이 사라진 그녀는 tvN 드라마 <일리 있는 사랑>의 주인공 김일리(이시영)다.

난감한 화제를 어린애처럼 두서없이 늘어놓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일리는 친구가 없다. 혼자 도시락을 먹고, 자신을 안드로메다로 데려다줄 UFO를 기다리는 모습이 그다지 외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고등학생쯤 되면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기엔 괴짜보다 평범함이 더 유용한 가면이란 걸 깨닫는다. 사춘기 무렵부터 필요에 따라 대인관계용 가면을 바꿔가며 연기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성 훈련이라 생각하는 나는 일리가 진심으로 UFO의 존재를 믿었는지보다 어째서 고2가 되도록 괴짜였는지가 알고 싶었다.

미대 진학을 권하는 선생님의 조언에 나만큼 그리는 애들이 흔하다고 손사래 치던 일리는 꿈이 페인트공이라 했다. 엄마 혼자 생계를 꾸리는 일리네 형편이 좀더 나았다면 그녀의 꿈은 달라졌을까? 세간의 시선과 기준에 동의하면 안쓰러운 자리에 놓이고 마는 삶의 당사자에겐 평범함보다 괴짜가 유용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자신이 원하고 선택한 목표에 전력을 다하는 그녀는 정말로 페인트공이 되었고, 임시 생물교사였던 남자 장희태(엄태웅)와 7년 후 다시 만나 결혼했으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원인 모를 병으로 전신마비가 된 시누이 희수(최여진)를 돌보며 시댁 뒤치다꺼리를 해왔다. 그렇게 7년이 더 지난 어느 날 일리는 동네 가구점 목수 김준(이수혁)에게 반하게 된다.

희생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연하남 판타지로 전락할 법한 이야기는 재밌게도 일리의 뒤를 밟으며 속을 태우는 남편 희태가 화자가 되어 균형을 잡는다. 오래전 분식집에서 미숙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자신이 울면 더 마음 아파할까봐 남편 앞에선 울지 않는 아내가 되었고, 고될수록 응석을 부리는 아내가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면 힘든 일이 있었던 걸 바로 알아채는 남편이 되었다. 권태라 하긴 너무 애틋한 둘 사이에 휘말린 목수까지 치명적으로 매력적이라 부부 모두를 반하게 만드니, 이 셋의 균형도 찾아질까 궁금하다.

+ α

그려라 이루어질 것이다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아 교과서에 이런저런 낙서를 가득 채우던 왼손잡이 여고생 일리는 생물교사 희태를 그리며 그와 꼭 결혼할 거라는 소망을 담는다. 일리 역의 이시영은 앞서 그림과 똑같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웹툰 작가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영화 <더 웹툰: 예고살인>에선 오른손잡이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