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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참으로 우스운, 하지만 아찔하게 먼

<풍문으로 들었소> 정성주 작가가 ‘갑’을 그리는 방식

<풍문으로 들었소>

“가장 현대적이면서 가장 고전적인, 그랜드한 매너!” 마침 실내악이 흐르던 참이라 지역 케이블TV의 웨딩홀 광고가 떠올랐으나, 실은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거대 로펌 대표 한정호(유준상)가 아들 인상(이준)에게 법을 공부하면 체화되는 매너를 설교하던 중이다. 탈모 외엔 별 고민 없던 일상은 아들이 난데없이 산달이 가까운 소녀를 데려오면서 깨지고, 경위를 설명하던 서봄(고아성)은 정호네 거실에서 진통을 시작한다. 이 소동을 비공식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한 한정호는 오페라를 크게 틀어 산모의 비명을 감추고 구급대원 앞에서 그랜드한 매너를 선보인다. “이렇게 기민하게 와주시다니 정말 놀랍고, 감사합니다.” 한정호 부부가 전통과 격식, 의전에 집착할수록 상황은 꼬이고 봄이는 더 깊숙이 자리잡는다. 쉴 새 없이 웃다 보면, 정성주 작가의 전작이 겹쳐지며 기분이 묘해질 때가 있다.

한정호의 로펌은 JTBC <밀회>처럼 상스러운 재벌의 약점을 쥐고 거래할 수 있는 집단이다. <아내의 자격>에서 두집 살림이 들통나 아파트 가스관에 매달리는 망신을 당했던 변호사 조현태(박혁권)가 “갑 중의 갑, 슈퍼 갑”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한정호와 마찬가지로 정부 요직 인사의 ‘회전문’으로 통하는 로펌 집안이었기 때문. 그런 한정호가 ‘파리 68혁명’, ‘이니셔티브(주도권) 선점’ 등의 대사를 뱉을 때마다 가깝게는 <아내의 자격>의 기자 한상진(장현성), 멀게는 MBC 드라마 <아줌마>의 장진구(강석우) 무리가 떠오른다. 이를테면, 불법의 경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전문직, 특권을 세습하는 극소수 ‘슈퍼 갑’을 내가 알아먹을 수 있는 스케일로 축소해 소비하는 기만적인 웃음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치는 것이다.

차라리 외부의 캐릭터를 나란히 놓아보는 게 좋겠다. <풍문으로 들었소>에 ‘절대 불법을 행하지 않는’ 특권층 전문직이 있다면 김운경 작가의 <유나의 거리>에는 줄곧 불법을 저지르는 하층민 전문직이 있다. 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운 소매치기 유나(김옥빈)는 ‘지갑은 털어도 하루 매상이 다 들어 있는 상인의 전대는 털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법 바깥에서 직업의 윤리를 세우는 인간이다. 타인과 관계 맺으며 자기검열은 더 촘촘해지고 스스로 행위의 제약을 거는 일이 많아진다. 역시 선친의 가업을 잇는 ‘의전의 달인’ 한정호는 법 안쪽에서 비윤리적인 거래를 일삼는다.

정성주 작가가 개념어를 독점하고 태만을 합리화하는 지식인 계급을 풍자했다면, 김운경 작가는 같은 언어를 하층민에게 적용해 독점을 해제하는 코미디를 보여준다. 여전히 몹시 웃기지만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넘치고, 과거 풍자의 대상이었던 계급이 하층민으로 추락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2015년의 독점은 뭘까 궁금해진다. “우리 부모님이 왜 가난한지, 부자가 왜 부자인지” 캐묻는 서봄이 찾을 답을 기다린다.

풍문으로 들은 ‘그 로펌’

베일에 싸인 특권층 로펌 집안의 내력을 들추는 SBS <풍문으로 들었소> 외에도 현실의 그 로펌이 주로 맡아서 논란이 되었던 사건을 극화한 MBC <개과천선>이나, SBS <신의 저울>을 함께 보아도 좋다. 계책을 내놓을 때마다 도리어 낭패를 보는 한정호가 그 집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보다 귀여워 보일 때, 특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