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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백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등장하는 사랑의 실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인간의 강렬한 감정은 대부분 무지 혹은 미지에서 온다. 대표적으로 공포심이 그렇다. 내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을 때 공포는 어둠 속에서 숨통을 조이며 다가온다. 반면에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대명천지에서 모든 것을 파악할 때 상대는 내 심정 안에 포섭된다. 설사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무섭지 않다. 그 느낌은 공포보다는 체념에 가까울 것이다. 체념은 공포처럼 강렬하지는 않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를 때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매우 제한적인 단어다. 오랜 세월 동안 상대방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쌓인 그런 감정,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위하고 싶은 그런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정은 이해심, 친밀함, 우정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두근거림 혹은 그리움이다. 만나면 가슴이 뛰고 만나지 못하면 하루 종일 그리게 되는 그런 사랑을 의미한다. 그저 하룻밤을 불태우고 싶은 성욕과도 다르다.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싶은 열정. 갈구. 그것은 무지에서 온다. 그래서 사랑은 그 어떤 사려 깊은 정서보다 강렬하다.

낯선 상대를 향한 사랑의 힘

애초에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율법에서 출발했다고 하지만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은 제목 그대로 사랑의 본질에 관한 보고서다. 군대 간 친구의 어머니 아파트에 기숙하는 젊은 우체국 직원 토멕(올라프 루바젠코)은 건너편 동에 사는 연상의 독신녀 마그다(그라지나 자폴로스카)를 일년 동안 망원경으로 훔쳐본다. 마그다를 더욱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그는 그녀가 받아야 할 한 남자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채고, 허위 우편환증서를 발행해 그녀가 우체국을 찾아오게 만든다. 심지어 그녀의 집을 방문하려고 우유 배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연히, 토멕은 마그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떤 여자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가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여러 남자를 경험해온 마그다는 토멕의 고백을 귀엽게 받아넘긴다. 사랑이란 서로를 이해할 때 생기는 것이며 기껏해야 성적 욕망의 근사치일 뿐이라고. 마그다는 자신의 집으로 토멕을 데려가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만지게 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결국 이거야.” 토멕은 황급히 그녀의 집을 나와버린다. 그가 몰랐던 그녀가 알몸으로 그와 마주한 것이다. 그때 그의 사랑은 완전히 증발해버린다. 그렇게 순식간에 깨진 사랑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토멕은 그날 밤 면도칼로 자신의 동맥을 끊는다. 하지만 다행히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때부터 다른 사랑이 시작된다. 마그다는 외로운 자신을 몰래 지켜보던 토멕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근무하던 우체국을 가보지만 토멕의 자리는 비어 있고 건너편 아파트의 토멕의 방은 늘 불이 꺼져 있다. 마그다는 그를 걱정하며 심지어 그를 깊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우체국에서 일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그다는 아파트 앞에서 마주친 집배원에게 토멕의 안부와 함께 한 가지 더 묻는다. “그런데… 그의 성(姓)은 뭐죠?”

나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의 원형질 속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루키노 비스콘티의 <백야>(1957)가 깊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 역시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의 힘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밤, 마을을 산책하고 있던 마리오(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작은 다리 위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는 나탈리아(마리아 셸)를 보고서, 모르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나탈리아의 가슴은 일년 전 자신을 떠난 한 남자에게 이미 온전히 빼앗긴 채다. 그는 그녀의 집 이층에 잠시 세 들어 살던 한 중년의 남자로, 그는 나탈리아와 짧은 사랑을 나눈 후 일년 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그녀를 떠나버린다. 그 후 나탈리아는 매일 밤 흐느끼며 마을 다리 위에서 그를 기다린다. 마리오는 나탈리아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의 이름도, 직업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나탈리아는 그 남자가 마을의 한 호텔로 돌아와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확신한다. 사랑이 깨질까봐 두려움에 떠는 나탈리아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대신 전해달라고 마리오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마그다에게 온 편지를 토멕이 가로챘듯이, 나탈리아가 보낸 편지를 마리오는 찢어서 강물에 던져버린다. 결국 떠난 지 일년이 지나도록 약속 장소에 남자는 오지 않고, 그제야 나탈리아는 마리오의 사랑에 대해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연다. 하지만 눈 내리는 새벽 마리오와 나탈리아가 다리 위를 거니던 날,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남자가 눈을 맞으며 나탈리아를 기다리고 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마리오를 떠밀고 일년간 떠돌던 모르는 남자의 품으로 뛰어간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결국 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랑이란 아름답고 숭고한 찬양의 대상이 아니다. 무모하고 맹목적이며 심지어 가변적이다. 나탈리아처럼 무지의 상태에서 가장 정열적이며 토멕처럼 상대방을 알게 되는 순간 과열된 유리잔처럼 날카롭게 깨져버린다. 그럼에도 사랑은 불가피하게 자기 파괴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 사랑은 상대방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소진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알고 싶어 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에 등장하는 중년의 남자 폴(말론 브랜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낡은 전셋집에서 우연히 만나 섹스를 즐기게 된 젊은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에게 이름, 직업, 나이 등 일체를 서로 묻지 말자고 제안한다. 잔느는 폴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는 폴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짐승처럼 살을 섞을 뿐이다. 상대방을 알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육욕일 뿐이다. 하지만 나이 들고 외로운 폴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는 영화 마지막에 자신에 대해 상세히 잔느에게 털어놓고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이 대목에서 지난 4월2일 세상을 떠난 재즈 색소폰 연주자 가토 바비에리의 B스럽고도 통속적인 테너 색소폰은 화면 전체에 점액질의 달큰한 조청을 잔뜩 끼얹는다.

세트로 지은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선을 절묘하게 포착한 <백야>에 비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지극히 상투적인 동시에 예술적이지도 않고 지적이지도 않다. 1970년대에 만연한 68세대의 과도한 노출증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몽매한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묘사한 <백야>에 비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오히려 사랑의 본성에 더욱 근접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사랑이란 그렇게 아름다운 게 아니지 않은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말하듯이 사랑이란 결국 강렬한 목마름, 배고픔, 외로움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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