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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영객잔] 이 육체성, 혹여 관념적이지는 않은가

왜 <은교>를 본 많은 사람들은 슬퍼하고 나는 헛헛했을까를 궁리함

젊은 배우가 분장을 하고 영화에서 노역을 맡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박해일이 주연한 <은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늙음과 관련이 있고 적어도 한국의 관객은 아무리 발달한 분장기술의 덕을 봤다고 해도 <은교>의 늙은 소설가 이적요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뗄 때 나는 연기 잘하는 배우 박해일도 고전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건 누가 봐도 젊은 박해일이 늙은 이적요를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영화가 텍스트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에서 매혹을 준다기보다는 텍스트 바깥의 관객 입장에서 다른 매혹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영화 중반에 늙은 이적요가 환상 속에서 청순하고 풋풋한 소녀 은교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올 때 그것은 늙은 이적요의 환상이라기보다 배우 박해일이 본모습으로 나온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실제로 함께 영화를 본 극장 안의 여성 관객에게서는 가느다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젊을뿐더러 싱그럽기까지 한 박해일이 귀염성있게 웃으며 은교를 쫓아 풀밭 위를 달릴 때 젊은 이적요가 아니라 젊은 박해일이 달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가진 늙음에 대한 공포의 반영

<은교>라는 영화의 바깥에서 젊음과 늙음을 번갈아 연기하는 배우의 현전을 보는 이 체험은 독특하다. 나 같은 관객은 박해일이라는 특정배우가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을 다른 어떤 영화에서보다 생생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영화 속의 늙음과 젊음의 대비에 관해선 촉이 잘 서지 않았다. 소재 자체가 명망을 얻은 늙은 소설가의 자기도취가 짙게 깔려 있는 데다 배우와 등장인물의 거리가 더 선명하게 지각됨으로써 소재의 자기도취성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영화 속의 또 다른 장면에서 늙은 이적요는 제자 서지우가 자신이 쓴 소설을 도둑질해 문예계간지에 발표한 소설 <은교>로 이상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 예상을 깨고 나타나서 축하 연설을 한다. “늙음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도 입지 않았던 납옷을 입는 것이다… 너희의 젊음은 너희가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 또한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은교>라는 영화 텍스트 안에서 이 말은 물론 이적요가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는 것일 수도, 그 소설을 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은교>라는 영화를 보는 우리는 동시에 극중 이적요를 연기하는 박해일의 말로도 받아들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젊음의 관능과 늙음의 추함을 주된 테마로 삼은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육체성이 혹시 관념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갖게 해준다. 영화가 시작했을 때 이적요가 산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각도로 잡혀있는 그의 쭈그러든 성기는 아마도 앞으로 발기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적요를 연기하는 박해일이 제자 서지우와 술을 마시는 이후 장면에서 관객에게 처음 입을 뗄 때 박해일로서의 그의 존재감이 새삼 상기되면서 이전의 쭈그러든 성기의 잔영은 사라진다. 박해일은 분명히 왕성하게 발기할 수 있는 남자배우일 것이다. 그런 젊은 배우가 나중 장면에서 늙음을 운위하며 납옷을 입는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 늙음에 대한 공포가 이 영화의 배면에 깔려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해도 이것은 늙을 것을 두려워하는 젊은이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배우와 극중 인물의 거리감에서 자연스레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적요의 자기도취는 성공한 국민시인, 어쩌다 제자의 이름으로 소설을 쓴 문인의 자기도취가 아니다. 그가 연민에 차서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는 것은, 그리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소녀의 육체를 찬미하는 것은 늙은 이적요의 심정이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젊은이의 늙음에 대한 공포의 반영이다. 당연히, 젊은 사람의 자기도취에 찬 그 공포를 만들어낸 이는 노인들이 보기엔 젊고, 젊은이들이 보기엔 나이 들어가는 이 영화의 감독 정지우이다.

은교, 현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과거로부터의 존재

거듭 말하지만 이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늙음이 아니라 다가올 늙음에 대한 공포와 연민으로 다가오는 주인공 이적요의 정서는 후반부에 극의 흐름이 급격하게 사건 중심으로 바뀌면서 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정서도 흥미롭다. 이 영화는 중반까지 이적요의 집에 느닷없이 나타난 청순한 소녀 은교와 그녀에게 매혹된 이적요의 심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적요의 헌신적인 제자이자 막 베스트셀러 장편소설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제자 서지우는 그런 그들의 관계를 질투하며 그들의 주변을 맴돈다. 중반 이후 서지우는 두 사람과 삼각관계를 이루며 나아가 스승의 소설을 훔쳐 스승을 배신하고 스승과 대립각을 세운다.

은교와 서지우는 영화 속에 묘사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은교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는 분위기로 묘사된다. 그녀의 몸을 담는 카메라는 관능적이고 청신하지만 그녀의 내면의 욕망은 잘 가늠되지 않는다. 그녀는 심하게 말하면 이미지로만, 탐미적인 이미지로만 제시된다. 이 이미지는 이적요에게 과거의 잃어버린 어떤 것들을 상기시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젊음이겠지만 그 젊음은 서지우에게도 있다. 은교는 이적요에게 사라진 욕망을 부추긴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적요의 첫사랑과 닮은 소녀로 나온다는 은교는 영화에서 아예 그런 배경도 지웠다. 은교의 탐미적인 이미지는 이적요가 겪는 고통이나 공허감을 가리고 덮어주는 이미지다.

이적요의 고통은 늙어간다는 것도 있지만 세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은둔자로서의 초반 이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속세적인 것과 거리를 두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의 세속적인 욕망 탓도 있을 것이다. 그는 서지우의 장편소설을 대신 써주면서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연장한다. 서지우는 그의 대리자다. 서지우에게 자신만의 글쓰기를 하라고 하지만 그의 곁에서 집사처럼 존재하는 서지우를 그는 내치지 않는다. 그와 서지우가 공유하는 세계는 직선적 시간의 세계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세계이다. 은둔자의 외피를 쓴 국민시인 이적요는 서지우를 통해 그런 그의 직선적 시간을 향한 욕망을 대리 집행한다. 그렇지만 그 문단세계라는 것이 다른 사바세계만큼이나 복잡한 권력의 위계와 계통이 존재하는 부패한 곳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 권력의 위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은둔자로서의 위장과 은밀한 매명 욕구를 동시에 해낸다. 서지우는 성공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의 어두운 자아의 거울이다. 문학적 재능은 없으면서도 세속적 욕망으로 뭉쳐 있는 서지우를 곁에 두는 건 이적요가 서지우와 나누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투명하고 탐미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은교는 공적인 부패 영역으로부터 전혀 침범받지 않은 듯한 존재로 그려진다. 은교는 불쑥 이적요의 빈집 흔들의자에 앉아 잠든 채로 영화에 처음 등장하고 곧잘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다. 끊임없이 공적인 스케줄을 확인하는 제자 서지우와 달리 은교와 함께 있을 때 이적요는 무구한 인간적 가치와 접촉이 이뤄지는 기쁨을 맛본다. 은교는 이적요 자신이나 서지우와 달리 세속적 욕망으로 인한 자기 소외를 겪지 않았고 파편화되지 않은 어떤 근원적인 대상처럼 제시된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은교는 높은 산에서 어머니가 선물로 준 거울을 서지우와 실랑이를 하다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트리자 심하게 절망한다. 서지우가 똑같은 것으로 사준다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 그게 똑같은 것일 수 있느냐고 화를 낸다. 변하지 않는 것, 대치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런 집착은 그녀의 존재 조건과 같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현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과거로부터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를 매개로 이적요는 자신의 젊은 시절 과거로, 퇴행의 환상으로 몰입해 들어간다. 그녀로 인해 이적요는 과거를 떠올렸고 욕망의 당당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한 급격한 상실감을 기초로 미친 듯이 소설 <은교>를 아무도 몰래 써내려간다. 서지우를 통해 확인되는 세속적인 성공의 간접적 대리 만족이 실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것임에 반해 은교와의 시간은 자기 소외 없는 온전한 충족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기억하는 과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충만한 시간이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감정은, 대다수 남자가 그렇듯이, 여자이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진부하지만 정신분석학적 가설을 잠깐만 인용해서 써보자면,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에서 어머니와의 육체적 결합이 충족됐던 경험이 아버지의 법을 알면서 억압되고 난 뒤에 어머니와의 결합을 꿈꾸는 모든 남성은 여성을 어머니의 대리자로 봄으로써 늘 어린애가 된다. 서지우가 내오는 밥상에는 까탈스럽게 굴던 이적요가 은교가 서툰 솜씨로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는 샌드위치와 미역국에는 맛있게 먹는 모습으로 반응한다. 그 밥은 연인이자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이적요는 자신의 생일날 찾아온 은교와 서지우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섹스하는 것을 본다. 이적요의 환상에 등장하는, 이적요와 은교의 섹스에 비해 이 두 사람의 섹스는 훨씬 노골적이고 공세적이며 마치 이적요 앞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공연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이 장면은 이적요에게 당연히 분노를 일으켜야 하겠지만 위태롭게 바깥마당에서 사다리를 대고 이 광경을 보는 이적요의 모습에는 분노만큼이나 공포가 느껴진다. 서재에 놓인, 육필원고를 담아두는 함을 수십년 동안 같은 자리에 둘 만큼 고정위치에 대한 집착이 큰 이적요에게 친숙한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낯선 광경은 경악할 일이다. 그 직전의 밤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이적요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표했던 서지우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이적요가 연모하는 대상과 섹스한다. 이걸 보고 느끼는 이적요의 감정은 아버지의 분노뿐만 아니라 아들의 두려움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곧 아버지가 금지했던 어머니/여자와의 섹스를 보는 두려움이다. 이 장면을 박해일이 아닌 실제 노인 배우가 연기했다면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모든 남성은 아버지이자 아들이기도 하다는 자명한 명제를 이 장면은 충격적으로 예시하는 것 같다.

어머니/여자의 섹스를 보는 두려움

그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여자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이적요의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남성은 자기 파괴에 이를지라도 어머니와 맺었던, 나와 너의 구분이 없고 오로지 육체의 상상적인 결합만이 있었던 그 시기를 꿈꾼다. 이 욕망은 남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심리적 조건이다. 은교는 이적요에게 그런 욕망을 투사하는 환상의 탐미적인 대상이었다. 이적요가 뾰족한 연필심은 슬프다, 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은교는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한 여자이다. 그녀는 그런 능력으로 인해 자신을 품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적요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별은 늘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소유자 서지우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녀는 실은 속이 텅 빈 기표이다. 서지우와 섹스를 하면서 은교는 서지우가 예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인용해 여고생도 외롭기 때문에 섹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적요나 서지우와 같은 내면의 감정을 그녀에게서 읽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놀랍게도 그렇기 때문에 은교는 영화 속 인물들 가운데 가장 상처받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에필로그에서 이제 대학생이 된 은교는 사태의 전말, 소설 <은교>를 이적요가 쓴 걸 알고 이적요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하고 떠난다. 이적요/박해일은 돌아누워 듣고 있으며 잠든 척하지만 사실은 울고 있다. 그는 은교가 떠나간 뒤에도 성숙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 그는 이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 영화에 제시된 식으로 읽으면 (박해일은, 정지우는, 그리고 우리는) 늙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까. 상황이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울게 된다. 눈물은 항상 무기력의 산물이다. 과연 그럴까. 남성 입장에서는 지독하게 탐미적인 영화 <은교>는 끝내 이적요/박해일의 욕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들고 궁금증만 남긴다. 나는 왜 이 영화를 보고 헛헛했는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무엇에 반응하며 슬퍼하는지 말이다. 우리는 상실감에 빠진 아들이자 아버지이고 과거의 어머니이자 현재의 소녀에게 매달린다. 직선적 시간 속 현실의 부패는 계속 돌고 도는데 우린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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