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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아르망의 기이한 모험의 경우
정한석 2012-11-29

<도주왕>에 나타난 전복적인 유머의 뉘앙스에 대하여

※유의사항: 반드시 영화 <도주왕>을 보신 다음에 이 글을 읽으시기를 청합니다. VOD와 DVD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1부 아르망은 무엇이 되는가

알랭 기로디의 <도주왕>은 시치미 뚝 잡아떼고 웃기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초반부에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배치되어 있다. 한적한 어느 날 밤 영화의 주인공 아르망은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노신사를 주의 깊게 뒤따라가는 중이다. 그런데 하필 아르망은 그때 한 무리의 십대 불한당 녀석들이 같은 또래의 소녀 한명을 끌고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걸 보고 만다. 그는 갈라지는 길 위에 서서 잠깐 동안 망설인다. 어쩌나, 모른 척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하나 아니면 저 소녀를 구해주어야 하나. 아르망은 발길을 돌려 위기에 빠진 저 소녀를 구하기로 한다. 소녀를 강간하려는 십대 녀석들을 향해 딱 버티고 선 아르망의 체격은 건장하다 못해 위협적일 정도로 뚱뚱한 덩치이니 비리비리한 저 녀석들 몇명쯤 겁주거나 패주는 건 일도 아닐 것 같다. 아르망이 노려보며 말한다. “여자를 놓아줘.” 녀석들이 지지 않고 말한다. “그래? 그럼 대신 뭘 줄 건데?” 몇 차례 오가는 신경전. “왜 그 큰 엉덩이로 덤비시게?”라고 녀석들이 도발하자 아르망은 “글쎄, 어쨌든 몇명은 깔아뭉갤 수 있겠지” 하며, 너희들 까불면 다 죽는다, 하는 투로 최종 경고한다. “어디 해보시지” 하며 녀석들이 아르망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그때 컷.

다음 장면에서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아르망은 현금인출기에 바짝 붙어 돈을 뽑으며 토라질 것처럼 한마디 간청한다. “그래도 비밀번호는… 보지… 마.” 이런, 비밀번호는 보지 말라니. 돈을 받은 녀석들은 유유히 사라지고 가진 돈을 다 털린 아르망은 허탈해하지만, 어쨌거나 소녀는 자기를 구해준 이 아저씨가 어찌나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운지 그의 품에 덥석 안긴다. 예상밖의 해결 방식에 웃음보가 터져나오고 말았지만, 그러고 보니 위기에 처한 저 소녀를 아르망이 구해내긴 한 것 같다. 현금인출기로 구해냈어도, 구해낸 건 구해낸 거다.

아르망은 프랑스의 조용한 시골 마을에 살고 있으며 농부들에게 트랙터를 파는 마흔세살의 영업사원이다. 이 소녀의 이름은 퀴를리, 열여섯살이다. 서로 어울릴 일은 없을 것 같은 아르망과 퀴를리의 관계가 이렇게 우연히 맺어지자 영화는 그들의 관계를 한번 더 지정해주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니까 아르망이 퀴를리를 구해집에 데려다준 날 밤 퀴를리는 아르망의 주머니에 다음날 학교로 와달라는 구원의 편지를 몰래 전한다.

그런데 아르망은 다음날 학교가 아니라 퀴를리의 집으로 찾아간다. 아르망이 우연히 지나다 들른 것처럼 위장하고 퀴를리의 집안을 탐색하고 나왔을 때 저기 집안의 꼭대기, 쇠창살이 박힌 좁은 창문 바깥으로 붉은 수건을 간절히 흔들며 아르망에게 구조 요청을 하고 있는 퀴를리의 손짓이 보인다. 이내 아르망은 다시 퀴를리의 집으로 몰래 들어가 옥탑에 갇힌 그녀를 구해낸다. 하지만 얼마 뒤 퀴를리의 아버지가 쫓아와 괴상한 방식으로 그를 고문하자 아르망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숨겨놓은 곳을 자백하고 만다. 하지만 이때 컷. 퀴를리의 집에서 퀴를리를 구해낸 이 장면이 다 꿈이라는 게 밝혀진다. 다만 꿈에서 구해냈고 비겁하게 자백까지 했어도 다시 한번 구원의 모티브가 발동한 건 사실이다.

이제 몇 가지가 분명해진다. 퀴를리는 집 바깥에서 도적떼 같은 녀석들에게 위험에 처하기 일쑤다. 집 안에 있다고 해도 무섭고 막돼먹은 아버지에게 붙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니 갇혀 있는 것에 진배없다. 그런 그녀를 그가 구하거나 구하는 꿈을 꾼다. 그러니까 아르망과 퀴를리를 맺어주는 <도주왕>의 이 초반부 내용에는 어떤 전제된 이야기 구조가 있다. 다름 아니라 영웅이 도적떼로부터 여인을 구하는 이야기, 영웅이 못된 왕이 지배하고 있는 탑에서 공주를 구해오는 이야기다. 옥탑방 쇠창살 바깥으로 붉은 수건을 펄럭이며 구조 신호를 보내는 꿈장면은 그래서 상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엉뚱하게도 아르망의 행동들을 보며 피오나 공주를 구출해내는 슈렉을 상기하거나 위기에 빠진 미모의 여인을 구해내는 <나잇 & 데이>의 톰 크루즈를 상기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슈렉>과 <나잇 & 데이>에 관하여 가장 처음 하게 되는 오해는 슈렉은 괴물이고 나잇은 나잇(night)일 거라는 점인데, 슈렉의 정체와 <나잇 & 데이>의 톰 크루즈의 정체는 실은 같다. 그들은 둘 다 기사(knight)다. 그러니까 좀 듬성하기는 해도 아르망의 이야기는 일종의 ‘기사도 로맨스’에 속해 있거나 적어도 기사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기사도 로맨스의 주인공들과 아르망 사이에는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아르망은 일단 겁쟁이다. 가만 보면 막 나가는 십대 불량배들에게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리고 모름지기 기사에게는 기사도라는 공고한 신념과 이상적 체제가 있어야 할 테지만 그에게 지금 있는 건 사십대 초반에 홀로 사는 남자가 느낄 만한 인생의 불안과 위기감뿐이다. 또한 모든 기사에게는 존경과 성심과 허세로 궁정식 사랑을 다 바쳐야 할 여인이 있지만 아르망에게는 퀴를리라는 여인이 나타났다 해도 그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는다. 일찌감치 아르망은 퀴를리에게 말한다. “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그는 게이다. 그럼에도 기사들이 마치 사제처럼 금욕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과 다르게 아르망은 그럴 생각이 아예 없다. 아르망의 성욕은 도대체 멈추지를 않는다. 그러니 <도주왕>을 일종의 기사도 로맨스라고 말해야 한다면 이건 좀 불안정하고 우스꽝스러운 외전으로서의 기사도 로맨스다.

기사의 체질을 갖지 않은 인물이 기사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을 때 앞으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도주왕>의 초반부 설정은 그와 같은 질문을 겨냥하고 증폭하고 있다. 돈키호테는 기사들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짝퉁 기사를 자처하게 되었지만 아르망은 그저 성욕의 밤에 그 대상을 쫓다보니 어쩌다 기사 작위를 얻었다. 운명의 장난으로 기사가 된 것이다. 공고한 기사도의 전통에 비춰볼 때 유독 위배되는 것이 많고 하자가 많은, 이 용맹함이 없는 겁쟁이 기사, 여인을 사랑하는 대신 남자를 사랑하는 게이 기사, 기사도 로맨스에는 들어섰으나 그 자신이 기사의 운명으로 살 수는 없다고 느끼는 기사. 그를 통해 이 영화는 어디로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아니 나아간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를 통해 이 영화는 어디로 튕겨지고 싶은 것일까.

제2부 도망은 누구를 위한 모험인가

처음에 아르망은 퀴를리와 성적인 교통을 시도해보지만 잘되질 않는다. 그런데 그 현장을 경찰에 들켜 성범죄자 취급을 받고는 전자 팔찌까지 차게 된다. 심경도 복잡한 나머지 여행이나 떠나려고 하는데 다시 퀴를리가 애원하듯 찾아오고 그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녀와 함께 도주극을 펼친다. 마치 이미 꾸었던 꿈의 반복인 양 퀴를리의 아버지, 마을 사람들, 경찰 일동이 그를 뒤쫓는다. V. Y. 프로프가 <민담의 기원> 후반부의 한장에 할애하여 이미 말한 것처럼 지구상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에서조차 도주는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주인공은 도주하며 빗을 던지거나 거울을 던지거나 유리병을 던져 마법을 펼친 다음 위기를 모면해왔다. 하지 만 같은 도주라도 아르망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도주한다. 그는 시종일관 뱀 껍질 같은 옷만 훌렁 던져둔 채로 엉덩이를 반쯤 드러내고 ‘빤스’만 입고 달리고 또 달려서 위기를 벗어난다. <도주왕>이라는 제목은 그런 그의 우스꽝스럽지만 기민한 도주 능력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물론이지만 그가 도주할 때의 익살스러운 활동감이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라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런 물음이 생길 수는 있다. 그의 행각이 도주이고 그가 도주를 잘하는 것도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이 도주란 퀴를리를 구해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니 아무리 엉터리 기사라도 그가 여인을 구해내기 위해 그런 것이라면 그는 구출왕이나 구조왕으로 불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만약 이 질문이 생긴다면 우린 이 질문 자체에 대해 다시 반문해보아야 한다. 이 도주는 정말 퀴를리를 구하기 위한 것인가, 정녕 그녀 자체가 아르망의 온전한 목적인가, 라고. 말하자면 감독 알랭 기로디는 왜 아르망에게 소년이 아니라 소녀를 데리고 도주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르망이 게이라는 점은 이미 말했다. 어쩌면 영화 초반부에 아르망을 기사로 만든 것도 바로 이 두 번째 모험극에서 역설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인 건 아니었을까.

<도주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지만 아르망의 심리적 행각을 보자면 그건 너무 근사하게 붙여진 말인 것 같다. 정황상 ‘도주왕’보다는 좀더 직접적인 느낌이 보태지는 ‘도망왕’ 정도로 불러야 딱 어울려 보인다. 도주라는 표현에는 어딘지 모르게 자유를 찾아서 맹렬하게, 라는 뉘앙스가, 도망이라는 표현에는 어딘지 모르게 비겁하게 회피하는, 이라는 뉘앙스가 더 짙다고 가정해볼 때, 아르망은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그와 그녀의 자유를 향하여 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무언가 비겁하게 회피하려고 도망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피하고 싶어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아르망이 언젠가 들은 말 하나와 그가 언젠가 했던 말 하나를 떠올려야만 한다. 그의 도망의 동기와 정체를 이해하기 위한 것들이다. 첫 번째, 아르망은 동네의 한 노인에게서, 그러니까 대단히 큰 성기를 지니고 있고, 잠시 아르망을 유혹했다가 실패한 뒤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시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한 노인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얼핏 듣는다. “남자라면 누구나 어린 소녀를 꿈꾼다”는 것이다. 정말인가, 남자라면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인가, 하고 아르망은 그 순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몇 장면 뒤에 등장할 그와 게이 친구가 나누는 대화에서 짙어진다. 돌연 인생과 정체성의 고민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르망. “지금까지 재미삼아 게이 노릇 한 것이냐”며 친구가 핀잔을 주자, 아르망이 대답한다. “이제 마흔이 넘었지만 또 다른 선택을 하고 싶어. 폭풍 같은 삶이었는데 이젠 지겨워. 남자라면 여자를 만나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때 그가 들은 말에도, 그가 뱉은 말에도 둘 다 “남자라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아르망의 정체성으로 보자면 사실 그 두 가지 남자라면, 이라는 조건은 고려할 가치가 별로 없다. 하지만 아르망은 자기의 남은 인생에서 그런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사랑의 도피, 사랑의 도주, 아르망의 도망은 그런 종류와 아무 관계가 없다. 퀴를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동정의 도주도 아니다. 이를테면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에서 두 연인이 세상의 추적자들을 피해 도주하는 것은 그들만의 피안의 세계가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혼연일체의 믿음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에서 꼬마 소년, 소녀도 그런 믿음을 안고 둘만의 왕국을 위해 도주한다. 많은 영화 속 도주자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피안을 즉 영원한 에덴을 찾아 떠나며 성공하거나 잠시 성공했다가 실패한다. 중요한 건 성공과 실패의 그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같은 꿈을 꾸며 움직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도주왕>의 도망극은 그것과 무관하다. 퀴를리는 아르망을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르망도 퀴를리를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황무지>의 연인들은 혼연일체를 꿈꾸지만 <도주왕>의 아르망과 퀴를리는 동상이몽을 꾼다.

더 우회할 필요가 없다. 아르망의 이 도망극은 더도 덜도 아닌 그의 겁먹은 자아가 얼렁뚱땅 부추긴 모험이다. “남자라면…”이라는 통념의 가정법이 체제적 불안이 되어 등 떠민 도망극이다. 따라서 이 도망극에는 절실한 사랑이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공포감과 그 치유를 위한 기대심리가 있다. 퀴를리는 결코 아르망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할 운명이다. 아르망이 그녀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의 공포심을 치유해줄 혹은 자기의 다른 어떤 환상을 채워줄 매개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저 소녀가 자신을 “남자라면…”이라는 그 체제 안의 인간으로 속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아르망에게는 있다. 그렇게 하여 다수의 남자들이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환상을 취하려 한다면 아르망은 그 다수의 남자들이 취한 통념적 환상을 다시 자기의 환상으로 취해보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남의 환상을 흉내내어 자신의 인생 전환을 기대하는 마음이 이 도망극을 추진시켰다.

그러므로 아르망과 퀴를리가 도망치는 순간부터 기사도 로맨스의 기조는 동시에 산산조각이 난 것이며 영화는 더이상 기사도적 구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현실에서 도피해보고 싶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사십대 초반 게이의 도망극이 된다. 남들에게는 너무 위험한 환상이거나 성사된다 해도 곤란에 처할 수 있는 종류이겠지만, 아르망은 오히려 그 곤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일반의 통념 안으로 귀속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아르망의 이 도망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공고한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망이 아니라 역으로 그 안에 속하기를 바라는 도망이다.

우리도 알고 있다. 아르망은 성적으로 퀴를리를 받아들이려 무던히 애썼다. 그건 종종 성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성적 욕망은 그녀와의 관계에서 본능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워 보인다. 성욕을 증강하는 신기한 약초의 도움이 없을 때는 어려움을 겪고, 성공한다 해도 일시적이다. 아르망은 때로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항문 섹스를 시도하다가 거절당하고 여린 소녀의 마음만 다치게 한다. 퀴를리는 저 아저씨가 왜 내가 허락한 질이 아니라 나의 항문을 더 탐하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르망 역시 아무래도 질을 사랑하지 못하고 항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이 도저히 수정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별안간 깨닫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아르망은 모든 걸 놓아버리고 다시 퀴를리에게서도 도망친다. “나만큼 아저씨를 사랑할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요?”라며 퀴를리가 따라붙거나 말거나 아르망은 자기의 옷을 벗어 퀴를리의 팔다리를 묶어 그녀를 버려둔 다음 다시 또 빤스만 입고 줄행랑을 친다.

도망치기 위한 구실 삼아 함께 도망친 소녀로부터 다시 도망치는 형국. 이렇게 이중의 도망신공을 펼치는 아르망은 과연 도망왕의 자리에 오를 만하다. 그가 도망칠 때 퀴를리는 두 가지 상반된 대사를 연이어 한다. “아저씨 사랑해요!”라고 외쳐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곧장 “변태!!”라고 욕한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장면이며 대사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저씨 변태야! 그래도 나는 아저씨를 영원히 사랑해요!’라고 앞뒤가 바뀐 말을 했더라면 우리는 퀴를리라는 이 소녀를 불쌍히 여겨야만 했을 것이다. 차라리 소녀가 아르망을 그냥 변태 정도로 생각하고 잊는 편이 그녀에게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아르망은 회피하지 않고 자기의 본능을 좇을 것이고, 후회하면서 뒤돌아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기는커녕 사랑이라는 환상을 구실로 떠나게 된 아르망의 도망극의 실체는 실은 자기애의 험난한 모험극이었다. 그리고 아르망의 이 기이한 모험의 경우는 아직 하룻밤의 피날레가 더 남아 있다.

제3부 가자, 정액 냄새 가득한 숲속으로

퀴를리에게서 도망친 아르망이 가는 곳은 그의 집이 아니다. 그는 마을 사람 라파이유가 숲에 지어놓은 외딴 오두막으로 향한다. 여기가 아르망의 모험이 닿는 최종 장소다. 그런데 아르망은 왜 여기로 오는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소에 대한 설명이 우선 필요하다. 영화의 초반부, 마을 남자들 세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집을 나선 다음 도착한 곳은 이 오두막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다 같이 바지를 내리고 쾌감과 열정에 젖어 자위를 한 다음 사업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헤어진다. 그때 아르망이 그들을 엿보고 있다. 그들이 떠나자 그들의 정액이 묻은 흙 밑에서 아르망은 괴상한 약초를 발견한다. 이 익명의 약초밭의 약초를 먹으면 성욕이 무한대로 왕성해진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때문에 퀴를리와 도망칠 때에도 잊지 않고 이곳에 들러 약초 뿌리 몇개를 훔쳐간다. 말하자면 여기는 성욕을 조장하는 음탕한 약초들이 무성한 밭이고 그 옆에 문제의 오두막이 지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종종 발칙한 일들이 벌어진다.

장소를 이해했다면 이젠 이상한 인물 하나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아르망에게 전자 팔찌를 채워 감시하고 그를 뒤쫓기도 하는 경찰관(으로 짐작되는 노인)이다. 그는 아르망이 “연륜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이미 귀신같이 알고 있고, 아르망이 자위를 하려 할 때에도 불쑥 나타나 훈계를 하고, 아르망이 전자 팔찌를 잘라내려 할 때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 그런 짓은 생각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아르망과 회사 사장이 이제 막 오럴섹스를 시작하려고 할 때에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중지시킨다. 실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여행을 가라고 지시한 것도 그였다. 그는 아르망을 어디서건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고 아르망의 마음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다. 이상하다. 그는 분명 극중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타자에 불과한데 그의 출현의 방식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신적인 방식이다. 도저히 말이 안되는 이 인물은 아르망에게는 신적인 처벌자이고 감시자이고 조종자다.

사실 우린 이런 존재들을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뉴욕 스토리> 중 우디 앨런 부분에서 허공에 커다랗게 나타나 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나운 엄마를 떠올리면 된다. 역시 우디 앨런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에서 옆에 앉은 여인에게 키스해도 괜찮다고 우디 앨런을 부추기는 험프리 보가트라는 환영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흔히는 익살극이나 디즈니의 만화에서 백의 천사, 검은 악마로 나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하는 그것들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환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극을 지탱하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는 독특한 설정 아래 있지만, 저 경찰관 노인도 이상의 예에서 말한 존재들과 다르지 않다.

아르망의 초자아적 인물, 그 경찰관 노인을 그렇게 불러도 될 것 같다. 초자아란 “자아에 대한 재판관이나 검열관의 역할. 양심, 자기 관찰, 이상의 형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정신분 석사전>에는 적혀 있다. 아르망을 감시하고 명령하고 지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는 마치 아르망의 초자아의 현현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인물을, 즉 주인공의 내면을 주관하고 검열하고 지시하는 이 신기한 인물을 아르망의 초자아적 인물이라고 인식한다고 했을 때, 그와 관련하여 무엇이 <도주왕>의 마지막 장면을 발칙하게 만드는가.

놀랍게도 아르망이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이 경찰관 노인과 라파이유가 오두막 옆 숲속에서 난리법석 섹스를 하고 있다. 아르망이 짐짓 놀라 보고 있을 때, 앞서 말한 그 정체불명의 노인(아르망에게 관심을 보였던 성기가 대단히 큰 그 노인)이 뒤에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저녁 내내 그렇게 우리 셋이 좀 놀았다”며 이제는 아르망에게 우리 둘이 섹스하자고 꼬인다. 그렇게 한 커플은 오두막 바깥에서 괴성을 지르며 섹스를 하고 노인과 아르망은 오두막으로 들어가 오럴섹스를 한다. 난데없는 장면이다. 이 노인과 오두막의 주인 라파이유는 그렇다 치고, 저 경찰관이 여기 와서 저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아르망의 초자아적 인물이 리비도의 밭에서 뒹구는 것에 관한 혹은 초자아는 어떻게 자기의 본분을 잊고 쾌락에 빠졌는가에 관한 유머다. 이런 표현이 정신분석학적으로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잘 모르겠고 그건 지금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매혹적인 유머는 종종 논리를 무색게 한다. 검열과 양심과 규율의 상위 심급으로 보였던 초자아적 인물조차 무장해제되어 지금 저렇게 허무맹랑하고 변칙적으로 굴면서 교성을 지르고 있을 때 이 장면의 발칙함이 지닌 유머의 힘이 놀라울 뿐이다. 아르망은 이제 여기서 더이상 도망가지 않는다. 그가 이 밤이 지고 내일이 와도 도망가지 않을까? 그가 자신의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밤에는 그가 좀 논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모험의 밤을 통해 알랭 기로디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내 생각에 그런 건 없다, 고 말하겠다. 다만 스스로 곤경이라고 자처했던 자기 본능을 마침내 즐기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어떤 전복적인 유머의 뉘앙스를 전하고는 싶어 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유머는 도발적이며 해방적이다. <도주왕>을 볼 때 은근한 이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 영화의 감상은 불쾌하거나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온통 심각한데도 정작 되돌리기 어려운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채는 게 좋다.

<도주왕>은 일종의 유머가 섞인 유희 그리고 놀이로 마감하는 영화다. 자신의 수세와 난처함을 갖고 노는 놀이다. 그러니 오두막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그 무슨 젠더 이론의 전위적 실천이기보다는 해방적 유머의 장이다. 그러니까 점잖게 말하면 이 밭은 프로이트적 리비도의 밭이고 이 오두막은 ‘다성적인’(polyphony) 성적 대화(바흐친)가 가능한 카니발의 오두막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막 나가는 장면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는 성욕의 밭, 난장의 오두막이다.

되도록 사정하지 않고 오래 버티고 싶다며,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사정하지 않는 한 내 사랑은 식지 않는다는 거야”라고 노인이 아르망에게 말해줄 때, 그의 말은 내가 나의 리비도로 충만한 이상 나의 사랑은 식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70년 뒤에나 그 말을 이해하겠네요”라고 아르망은 대꾸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미 노인과 몸을 섞고 있으니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그때 바깥에서 경찰관과 라파이유가 들어와 추우니 침대에 함께 누워도 되겠느냐고 물으며 합세한다. 돌아가면, 각자 경찰이고, 농부이고, 할아버지이고, 농기계 영업사원인 그들이 지금은 여기 이 좁은 침대 안에서 벌거벗고 함께 누워서 불을 끌 때 이 영화도 끝난다. 그러니 이 영화를 두고 혹시라도 감독 알랭 기로디가 게이이고 그의 영화에 게이 주인공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여 <도주왕>은 퀴어영화다, 이 장면은 퀴어영화의 마지막으로 뛰어나다, 라는 말로 요약하려고 들어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여성이 주인공이니 여성영화라거나 남성이 주인공이니 남성영화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는 실수가 될 것이다. 이 영화는 리비도가 넘쳐 숲을 채우는 카니발적 난장의 영화, 일상에서는 꿈도 못 꾸는 나와 당신 같은 이들을 위해 저 너머까지 가보는 활기차고 원시적이며 유머러스한 모험극이다.

엉성한 기사도 로맨스로 시작하여 자기애의 도망극으로 선회하는가 싶더니 다시 돌아와 카니발적 난장으로 끝내는 이 영화가 나는 시종일관 불길하고 혼란스럽고 엉큼해서 되레 웃기고 귀엽고 쾌활하게 느껴진다. 동시대 프랑스영화들은 사실 모범생이 너무 많거나 놀아도 잘 못 노는 영화들이 많다는 인상을 준다. 희귀하게도 알랭 기로디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감독이 좀 놀 줄 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마흔세살의 남자와 열여섯살 소녀가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가, 다 합치면 200살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들 넷이 벌거벗고 한 침대에서 자는 장면으로 끝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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