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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패터슨>이 묻는다

각각의 모든 삶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상은 단조롭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것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일상은 곧잘 ‘죽은 시간’(dead time)으로 취급되면서 스크린에서 지워지기 일쑤다. 한마디로, 일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만 영화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짐 자무시는 <커피와 담배>(2003) 등에서 죽은 시간만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데 관심을 보이곤 했지만 <패터슨>(2016)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죽은 시간을 ‘생동하는 시간’으로 되살리는 마술을 부린다. 짐 자무시는 영화의 대부분을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일을 하고,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마빈과 함께 산책하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 동일한 행동. 그러니까 ‘죽은 시간’의 연쇄. 그럼에도 죽은 시간이 생동하는 시간으로 변모하는 <패터슨>의 마술은 멈출 줄 모른다. 아름답고도 신기한 마술.

죽은 시간 되살리기

영화의 마지막 무렵에 등장한 일본에서 온 시인은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라고 말하며 패터슨에게 텅 빈 노트를 선물한다. 우리는 이 텅 빈 노트를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이 텅 빈 노트야말로 시인이 간직해야 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텅 빈 노트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텅 빈 공간이지만,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언어와 의미가 그 자리의 임자가 될 수 있다. 비어 있음으로 인해 가장 풍요로울 수 있는 이 역설이 텅 빈 노트가 세상의 모든 시를 품을 수 있도록 한다. 짐 자무시가 보기에 우리의 일상은 이러한 텅 빈 노트와 비슷하다. 그에게 일상은 아무 의미 없는 동일한 것들의 반복이지만, 그렇기에 일상은 세상의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짐 자무시가 이 무의미한 일상 속에 패터슨과 그가 운전하는 버스를 통과시킬 때, 그리고 패터슨이 관찰한 것들이 시로 쓰일 때마다, 일상은 자신이 품고 있던 풍요로운 의미를 조금씩 드러낸다. 그러니까 패터슨은 일종의 리트머스 종이다.

우리는 짐 자무시가 많고 많은 직업 중에 왜 버스 기사로 패터슨의 직업을 설정했을까, 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패터슨은 택시 기사도 화물차 기사도 아닌, ‘버스 기사’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를 매일같이 반복해서 이동해야 하는 버스 기사. 우리의 일상처럼, 버스 기사는 ‘동일한 것의 반복’을 의무로 갖는다. 하지만 짐 자무시가 원하는 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차이의 반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다. 패터슨의 일상이 매번 동일하게 반복된다 해도, 그가 시를 쓰는 순간 그의 하루는 그 어떤 하루와도 같을 수 없다. 패터슨의 시는 동일한 것의 반복인 일상을 차이의 반복으로 변모시키는 힘이고, 이를 통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각기 다른 하루가 된다. 이러한 차이의 생성이 있는 한 일상은 결코 ‘죽은 시간’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패터슨이 다음날 들려줄 시를 기대했다면, 이는 패터슨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 즉 일상을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의 시는 늘 새로운 하루를 연다.

패터슨은 어떻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나

차이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차이를 본다는 것은 동일성보다 남다른 특이성을 우선적으로 보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들뢰즈에게 차이의 긍정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관용과는 다르다. 그에게 차이가 중요했던 까닭은 차이의 긍정이야말로 주체가 타자를 수용하여 새롭게 변화하고, 타자와 만나서 다른 무엇인가를 생성하거나 창조적 변이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가 <패터슨>에서 주목해야 하는 장면은 패터슨씨가 패터슨시와 교감하는 순간과 그것이 시로 펼쳐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씨네21> 지난 1136호 영화비평 지면에서, 영화평론가 김지미는 “패터슨 자신은 현대성을 체험하는 새로운 종류의 지각 경험들을 담지하고 있었던 보들레르의 ‘산책자’가 기계화된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버스에 몸을 싣고 정해진 노선을 따라 도시를 부유한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는 화면에 기계화된 리듬감을 선사”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김지미의 이러한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의 지적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다. 이 기계화된 리듬 속에 <패터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들, 그러니까 패터슨이 떠올린 시상이 이미지화될 때마다 등장하는 이중인화된 화면들이 말이다.

짐 자무시는 패터슨이 시를 쓸 때마다 그가 바라본 대상과 시를 쓰는 노트, 그리고 운전하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패터슨의 모습을 이중인화하여 보여준다. 나는 이 일련의 장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짐 자무시가 생각하는 시의 존재론, 또는 예술관을 내비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이중인화된 화면 속에는 시를 쓰는 주체와 관찰 대상간의 경계, 그러니까 서로 각기 분리되어 존재하던 것들간의 구분이 사라진다. 패터슨의 시는 주체와 객체 사이 경계가 사라진 결과다. 패터슨의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에 직접 새겨지는 시의 문장들 속에서 패터슨씨와 패터슨시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 달리 말해, 패터슨에게서 삶과 예술은 구분할 수 없다.

미셸 푸코는 “우리 사회에서 예술은 개인들 또는 삶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상들에만 관련된 것이 되었다. 그러한 예술이란 예술가들이나 전문가들이 전문화한 혹은 실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모든 삶이 예술 작품이 될 수는 없을까? 왜 집 또는 전등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그렇게 안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패터슨의 예술적 삶은 푸코가 던진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긍정적 응답의 사례처럼 보인다. 패터슨의 표정은 우리의 일상을 닮았다. 단조롭다 못해 무미건조해 보이는 표정. 하지만 그 표면 안에는 수많은 격정이 숨어 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일상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차이를 끄집어내는 행위,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을 예술화하는 실천적 행위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패터슨이야말로 삶과 예술을 통합한 이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 있다. <패터슨>에는 아주 상투적이고 식상한 기법이지만 이상하리마치 신비롭게 다가온 한 장면이 있다. 일본인 시인이 떠나고 나면, 패터슨은 텅 빈 노트를 들고 홀로 벤치에 앉아 있다. 이때 카메라는 패터슨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양 그에게 다가간다. 나는 이 장면에서 마치 시상이 불쑥 그에게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카메라의 움직임 속에 <패터슨>을 보며 느꼈던 아름다움과 신기함 모두가 담겨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카메라의 움직임 이후 “한 소절”이라는 자막이 화면에 새겨지고 패터슨은 시를 쓴다. 패터슨이 할아버지의 노래 중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라는 한 소절만 흥얼거리게 되는 것처럼, 내게도 이 장면은 그런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물론 당신에게는 그 기억의 대상이 이 장면이 아닐 수도 있다. <패터슨>에는 기억할 만한 수많은 소절이 있으니까. 분명한 사실은 <패터슨>은 2017년 개봉한 수많은 영화 중에서도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와 같은 단 하나의 ‘한 소절’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치 나머지 영화들은 올해 없어도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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