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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와 <서양 골동 양과자점>
2002-06-07

폭신한 케이크에 웃음 한겹

한동안 참 많은 요리를 먹었다. <미스터 초밥왕>에서 최고의 초밥이 담긴 접시를 건네받았고,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짜장면>도 맛보았다. <맛의 달인>이 차려주는 궁극의 메뉴까지 샅샅이 섭렵했다. 배도 제법 불렀고, 이젠 좀 지겨워질 때도 되었나? 잠깐, 그래도 입가심이라도 해야지. 달짝지근한 케이크에 아이스크림 정도가 어떨까? 요리만화라면 나올 것은 다 나왔다 싶었지만, 이 만화들을 보니 정말 확실히 중요한 뭔가 빠져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서울문화사에서 현재 2권씩 차려내놓은 구보노치 에이사쿠의 <쇼콜라>와 요시나가 후미의 <서양 골동 양과자점>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케이크와 과자들로 우리를 유혹하는 케이크 가게 만화다. 그런데 역시 요리점과 제과점은 다른 분위기, 정통 요리만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한쪽은 정말로 온몸이 끈적거릴 정도로 달짝지근하고, 한쪽은 과연 언제 케이크를 먹어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동이 계속된다.

야쿠자 보스, 케이크 가게를 차리다

<쇼콜라>(chocolat)는 프랑스어로 초콜릿이라는 뜻. 제목부터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지만, 이 만화에서 제대로 된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는 조금 뜸을 들여야 한다. 5년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된 야쿠자 조직원 가토 이치고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읊조리며 제법 사나이다운 멋을 부리며 걸어나온다. 하지만 그를 맞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얼마 안 있어 하늘처럼 믿고 따랐던 보스가 최악의 배신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신이라. 산다는 게 그런 것이지. 보스가 그를 다른 조직에 팔아넘겼을까? 아니면 지역을 물려받은 똘마니 밑에서 구두나 닦으라고 시키는 걸까? 아니, 그 멋지던 보스가 카리스마는 모두 던져버리고, 카이제르 수염에 주방 모자를 쓰고 케이크 가게를 차린 것이다. 2개월 전 죽은 아내 마야의 소원을 이제나마 들어주는 것이란다. 가토가 도저히 뒤바뀐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넋이 나가 있을 때, 이 케이크 가게를 습격해온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죽은 마야가 대재벌인 전 남편의 사이에서 낳은 딸, 치요코가 찾아온 것이다.

<서양 골동 양과자점> 역시 만화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제법 멋들어진 케이크와 현란한 미사여구가 등장하지만, 왠지 무언가에 속고 있는 느낌이다. 고급 주택가 어귀에 ‘안티크’라는 케이크 가게가 만들어지고, 이 가게를 중심으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불쑥불쑥 등장하는 인물들의 산만한 과거와 현재를 엮어나가는 퍼즐이 제법 복잡하다. 그러나 어렵게어렵게 고리를 풀어나가면 의외로 만화는 명징해진다. 케이크 요리만화의 달콤한 껍질을 쓰고 있는 이 만화는 각각 색다른 매력으로 무장한 미남자들의 세미 동성애만화다. 무뚝뚝한 부잣집 아들이지만 손님 앞에서는 영업 모드로 현란한 화술을 구사하는 주인 다치바나, 지금까지 거절당한 남자라곤 고교 시절의 다치바나밖에 없는 ‘마성의 게이’이자 업계 최고의 파티셰인 오노, 그리고 전직 세계 챔피언 복서이지만 이제는 케이크 배우기에 뛰어든 건방진 조수 에이지. 그 밖에도 다채로운 메뉴가 널려 있으니 마음껏 골라 드시라.

‘마성의 게이’라는 황당한 인물과 낯뜨거운 대사들…. <서양 골동 양과자점>의 핏줄이 동성애만화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만화가 다른 취향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하는 데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 만화는 어쩐지 프랑스 레스토랑을 무대로 ‘요리’ 자체보다는 여러 인물들이 부딪치는 사건을 통해 웃음과 감동을 버무리는 사시키 노리코의 <헤븐>과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두 가게 모두, 우리에게 전달하는 최고의 서비스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아닌가?

과자가게의 달콤한 남자들

<쇼콜라>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웃음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조폭의 세계를 남자의 로망이라 여기는 가토와 조직해체 이후에도 걸핏하면 천장에 숨어 권총을 겨누는 전직 킬러 슈조는 한국 조폭 코미디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시대착오적 인물들이다. 조금은 썰렁해 보이는 유머라도 두 페이지에 하나씩 집어넣는 정성도 무시 못하고, 만화체로 그려진 개그 터치도 즐거이 볼 만하다. 하지만 아직은 <헤븐>이나 <서양 골동 양과자점>이 보여주는 웃음의 맛에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소년만화의 현대적 기법에 능통한 만화가의 그림과 연출솜씨는 옹골차면서도 기발한 장면들을 많이 보여준다. 까무잡잡한 얼굴로 은어를 남발하는 여고생들의 특징을 잡아낸 표현, 두목이 상대파 보스를 후려치는 장면에서 압도적인 효과음으로 그 느낌을 극대화한 묘사 등은 매우 훌륭하다.

좋은 기본기를 갖추어 갈고 닦기에 따라 괜찮은 작품이 될 것 같은 <쇼콜라>, 이미 자기 경지에 올라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서양 골동 양과자점>, 그리고 확고한 인기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주는 <헤븐>을 서로 비교해가며 즐겨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만화도 요리처럼 하나만 먹으면 질리니, 번갈아 돌려가며 먹어보자.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