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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공적인 역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공적인 역사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소설가 한정현이 <마고>의 작가의 말에 쓴 문장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유효하다. 고리타분하지만 ‘격동의 한국사’를 대체할 표현을 찾기 어려운 과거사에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다친 사람들, 그로 인해 더불어 숨어야 했던 피해자 가족들의 서사를 한정현은 집요하게 추격하고 상상해왔다. 한정현의 소설을 따라왔던 독자라면 역사와 피해자, 퀴어 인물들의 주체화, 여성 연구자가 숨은 퀴어와 여성을 가시화하는 과정을 연상할 수 있다. 두 번째 소설집 <쿄코와 쿄지>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표제작 <쿄코와 쿄지>는 광주를 배경으로 혜숙, 미선, 영성의 우정, 이들이 가부장제하에서 받은 고통과 폭력을 극복하고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가 서술된다. 다음 세대에 의해 전 세대 여성들의 발자취가 그려지는 방식은 한정현의 장편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도 연상된다. 소설 속에서 딸 영소는 엄마에게 이렇게 묻는다. “엄마는 왜 경자가 되었어?” 이는 김경녀였던 엄마의 이름이 왜 김경자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엄마에게 영향을 주고 어떤 경험을 거쳐 지금의 경자가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애정을 품게 되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당신은 어떻게 지금의 당신이 되었나요. 친구들은 서로에게도 간혹 이런 질문을 했고 영성은 이해 못할 소리를 한다.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뛰고 싶어, 깨부수고 싶어, 까무러치고 싶어. 10년 후에 깨고 싶어.” 좋아하는 시를 기억나는 대로 말한 거라지만 영성의 발언은 오래도록 기억에 자리한다. 좋아하는 오빠를 따라 야학에 들어간 혜숙을 보며 영성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 다른 세계로 갔구나. 혜숙이는.” 내가 너 대신 고통을 겪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계가 여기에는 있다. 현실에는 사라져버리고 있는 그 대체 불가한 애정이 고통의 한복판에 자리하는 것을 읽으며 생각한다. 현실이 아닌 저 세계가 있어 다행이라고, 현실에서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런 소설이 있는 한, 분명 우리는 다시 좋은 세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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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침묵은 일종의 강요된 것이었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자를 목격했을 때의 침묵, 강요된 복종을 거부하는 자를 바라볼 때의 침묵, 부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보다 공포가 더 선명해 보일 때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