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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변소
2002-07-25

anivision

화장실에 깔끔한 타일과 수세식 변기가 있다면, 변소에는 똥파리와 푸세식 변기가 있다. 수세식 변기가 기세 좋게 똥을 삼킬 때, 푸세식 변기는 똥을 묵히고 또 묵힌다. 시작부터 웬 냄새나는 이야기인고 하니, 단편 <일곱 살>의 무대가 바로 ‘변소’이기 때문이다. 제15회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학생 경쟁부문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미운 일곱살의 반항을 변소의 공포와 함께 그려냈다.

<일곱 살>에 등장하는 변소는 조금은 근대화된, 신문지 대신 휴지가 있고, 변기도 요즘 것마냥 하얀 곳이다. 유독 넓지만 지독한 냄새와 어두운 공포를 품고 있는 장소. 남동생 역성만 드는 엄마를 피해 달아날 곳은 그러나 여기밖에 없다. 어두컴컴한 변소 문 걸어 잠그고, 일곱살 소녀 유주는 벽에 낙서를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엄마와 남동생.

그림으로나마 이들에게 실컷 보복을 하면서, 나오라고 애원하는 엄마를 몇번이고 통쾌하게 거부해보기도 하는 소녀. 심심하지도 않다. 이리저리 윙윙대는 똥파리 보느라 정신 잃고, 화장실 줄에 매달려 놀기도 한다. 저 위에 뚫린 창문으로 아직 빛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소녀는 콧노래마저 부르며 신나게 반항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통쾌함도 잠시, 화난 엄마가 화장실 불을 끄고 가버리고, 어둠이 내려앉자 변소는 서서히 공포의 장소로 변한다.

공중에서는 거미가 곡예하고, 세찬 바람 탓에 화장실 문에는 무서운 그림자가 일렁인다. 문에 비친 그림자 보며 울먹이는데 저 위 창문에서 뭔가 내려다보고 있다. 번쩍번쩍 빛나는 저건! 다름 아닌 고양이 눈이다. 으악! 이제는 반항이고 뭐고 없다. 소녀는 문을 어떻게 박차고 나왔는지도 모르게 재빨리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활짝 열린 화장실 문, 그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가는 검은 고양이, 세숫대야, 수도꼭지, 그리고 별이 총총한 하늘…. 숨가쁜 기척 뒤에는 밤 풍경만이 남는다.

징조가 나쁘다는 검은 고양이는 정말 유주를 잡으러온 귀신이었을까. 거미는 검은 고양이의 앞길을 안내해준 사신이었을까. 바람은 악마의 장난이었을까. 일곱살 소녀의 반란은 무서운 체험으로 끝나고 말았다. 2001년에 제작된 <일곱 살>은 5분30초가량의 단편으로, 셀에 드로잉 기법을 사용했다. 한국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2기 출신인 작가 김상남은 어릴 적 경험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제주도 화장실은 무척 넓어요. 어릴 적 제주도집 화장실을 약간 재구성해서 무대를 만들었죠. 애니메이션아카데미 1차 작품으로 만든 건데, 스토리를 발전시켜가면서 진행했던 방식입니다.” 작가가 그려낸 제주도 변소와 소녀는 자그레브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인상을 남겼나보다.

<일곱 살>은 실제 일곱살 소녀가 그린 것 같은 그림체와 아마추어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더욱 사실적으로 보인다. 스토리를 알아도 무방한 게 연출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소년과 어머니가 낙서로 변하는 도입 부분은 특히 인상적.

반항을 포기한 소녀가 엄마 품에서 안겨 잠들었을 것 같은 밤. 이제 일곱살 소녀는 커버렸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도 잊을 수 없다. 변소 밑에서 얼씬대던 색색의 손들을, 코를 찌르던 독한 냄새를, 공중에서 부유하던 거미를, 번쩍번쩍 빛나던 고양이 눈을, 제주도 화장실이라면 저 아래 돼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곱살, 변소가 세상의 가장 큰 장벽으로 보였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