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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만화` 유감
2002-08-08

만화가 슬프다

먼저 오늘의 우리만화가 총체적 부실과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선언적으로 밝힌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만화’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만화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우리’, 그러니까 ‘한국’ 만화고 후자는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만화를 뜻한다. 한마디로 한국 만화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팔리는 만화는 모조리 허약한 기초에서 배고픈 오늘을 견디며, 암울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답답함을 지나, 괴로움을 거쳐, 이제 슬프다.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며 가장 많은 세대에 사랑받는 만화시장을 보유한 일본에 맞서 자국의 만화를 지켜낸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지만, 지금은 그런 자부심도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하다.

일본 따라가다 찢어진 가랑이

<웁스>와 <쥬티>의 폐간을 접하며, “전혀 다른 토양에 이식된 일본식 만화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안주한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공식적으로 철회한다”라고 말했는데, ‘오늘의 우리만화상’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한국 만화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현재 우리나라의 만화시스템(대형 만화출판사들의 시스템)은 전형적인 일본식 만화시스템이다. 일본식 만화시스템은 이른바 ‘소년만화’라는 화두를 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였다. 80년대 우리나라에 일본 만화 복제본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시티헌터>와 <북두의 권>이었지만, 500원짜리에서 일약 권당 1천원짜리 주간만화잡지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작품은 <드래곤볼>이었고, <소년챔프>를 다른 전통적인 만화잡지에 승승장구하게 만든 작품은 <슬램덩크>였다. 이 두 작품은 기존의 대본소 만화나 아동잡지 만화(대표적으로 <보물섬>에 연재된 만화)와 전혀 다른 새로운 90년대적 정서를 대표하며 청소년을 사로잡았고 급격히 일본식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정착시켰다(이 두 작품 이전까지 우리나라 만화는 80년대 <보물섬>의 아동만화와 같은 어법을 구사했다). 일본식 만화시스템은 저가의 잡지에서 나오는 손해를 ‘싼’ 단행본의 대량판매로 메우는 식이다. 이건 오직 ‘일본’만 가능하다. 일본은 오랫동안 만화시장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키며 주간지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도 팔릴수록 손해보는 잡지를 만들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잡지는 수익이 있어야만 존재가 가능하다. 단행본을 팔아서 수익을 내기보다는 잡지를 통해 수익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일본식 시스템은 저가에 대량 소비되는 만화의 생산구조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시장의 성숙도와 크기와 역사가 다른 우리나라에서 맞지 않는, 더불어 그리 권장하고 싶지 않은 옷이었다(하지만 그때는 거대한 시장의 후광만 빛나 보였다). 도입 초기에 세기적 히트작의 힘에 기대 잠깐 판매시장이 성숙된 것처럼 보였지만, 맞지 않는 옷의 폐해는 금방 드러났다. 히트작의 약효가 약해진 뒤 수익구조가 악화된 출판사들은 점차 일본의 단행본을 마구잡이로 찍기 시작했다. 단행본의 종수가 많아지자 독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틈바구니에 대여시스템이 파고들었다. 대여점은 만화를 말살하려는 빅 브러더의 음모도 아니고, 세기말의 재앙도 아닌, 자본주의의 시장논리가 만들어낸 고지라다(서찬휘씨는 “대여점과 출판, 유통 등 만화출판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체제들과 ‘만화를 보고 있는 이들’의 정신없는 난교(亂交) 속에 탄생한 한 마리 거대괴수”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100% 동감한다).

이 왜곡된 시스템, ‘고지라’는 모든 상식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규모로 끌어들인다. 인기작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기작에 대한 여러 데이터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것은 독자들의 의견이 100% 반영된 진정한 인기작이 아니라 고지라 몸에 맞게 변형된 인기이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작품들 중 눈에 익은 작품들(대부분 장기연재작)이 구매와 대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곡된 우리나라의 만화시장은 아직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만들어내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논의와 사전조사가 필요하다. 혹 ‘오늘의 우리만화’가 인기도 순위조사에 따른 수상제도였다고 해도 좀더 깊이있는 연구와 논의가 필요했다. 지금과 같은 여건에서 대여점과 서점 등 639개 업체를 대상으로 소비자 선호도 조사를 거쳐 18개 작품을 선정하고 이중 6개를 골라 뽑은 방식은 문제가 있다. 대여점과 서점이 만화 독자의 선호도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왜곡된 시스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거기서 문제는 ‘대여점’이다. ‘대여점’의 대여순위를 바탕으로 소비자 선호도를 조사한 것도 문제가 있지만, 만약 대여점주들에게 의뢰해 소비자 선호도를 조사했다면,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마치 극장주들이 오늘의 우리영화를 뽑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곡된 시스템 속에 선정된 비틀린 삶

박성우의 <나우>,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강은영의 <야야>, 양재현·전극진의 <열혈강호>, 임재원의 <>, 홍은영의 <그리스로마 신화>. 2002년 오늘의 우리만화 상반기 수상작으로 선정된 6편의 작품이다. ‘오늘의 우리만화’는 일간스포츠와 문화관광부가 공동 주최하는 시상식이다. 정부에서 주는 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권위 있어야 하는 상이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다. 1999년 시작된 이래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기준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002년에 선정방식과 주관사가 바뀌었는데,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에서 밝힌 것처럼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 평가했다는 내용은 더욱 의문이 든다. 태생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왕 시작한 상이라면 명칭에 걸맞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 바로 ‘우리’를 대표하는 만화를 만나고 싶다는 말이다. 도대체 언제 적 <열혈강호>이며, <>이라는 말인가! 우리만화의 현실을 마주하는 것 같아 참혹한 마음에 괜히 가슴이 저민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