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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O.S.T
2002-11-14

차분하고 탄탄한 선율,자신있는 멜로디

보기 드문 탄탄한 영화였다. 히치콕식의, 다가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욕망의 대리 충족을 꾀하는 이상심리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왜곡된 욕망추구를 비밀의 껍질 벗기듯 한 꺼풀씩 벗겨내는 점은 히치콕적인데,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을 섬뜩하게 묘사하는 히치콕식 전율은 조금 약하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의도일 수도 있다. 전율의 순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담담하게 다가오고 지나간다. 그런 점들은 심리의 사실적 흐름들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심리극을 연상시킨다.

음악 역시, 심리의 뒤틀림을 표현하는 멜로디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차분하다. 클래식 음악적인 패턴을 대중음악 그룹에 삽입시켜 주목받았던 그룹 ‘베이시스’의 리더였던 정재형이 음악을 맡았다. 한양대 작곡과를 나온 그는 베이시스를 하던 중 도불, 프랑스의 ‘음악사범학교’(Ecole Normale de Musique)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했고 현재는 이 학교에서 클래식 석사과정을 하고 있다. 영화음악을 전공한 이후 본격적으로 맡은 첫 영화가 <중독>이다. 그런 만큼 의욕이 넘친다. 자신감 있는 멜로디 구사는 그가 탄탄한 준비를 한 영화음악가라는 점을 알려준다. 영화를 여는 <플로로그>는 온음음계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조성이 변화하는 테마로 시작되는데, 그 변화의 구성이 짜임새 있어 보인다. 두 번째 곡은 그가 작곡한 ‘샹송’이다. 주인공들의 중요한 추억과 관련있는 이 보사노바풍의 슬픈 샹송은 한국 사람이 짓고 한국 사람이 프랑스어로 가사를 붙였으며 한국 사람이 프랑스어로 노래한 특이한 샹송이다. 연주력을 갖춘 세션들의 반주가 안정되어 있고 가수의 발음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그런데 왜 샹송일까

정재형은 안정된 작곡능력을 바탕으로 절제된 표현법을 구사하여 관객에게 다가가고 있다. 때로는 에릭 사티를 연상시키는 단순명료한, 그러나 꼬인 멜로디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반주의 클라리넷이 오래도록 흘러 한 사람의 심리의 흐름을 내면 깊숙이 쫓아들어가기도 한다. 영화의 분위기를 잘 읽고 그에 부합하는 음악을 만들어낸 수작 영화음악이라 할 수 있다. 가끔씩 불협이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협화음 위주의 안정된 화성이 구사되고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니까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너무 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하나의 의도일 수 있다. 아무리 비정상적인 심리 게임에 임해 있다 하더라도 인물들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차분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대응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할 때 불협을 너무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묘한 방식으로 꼬인 심리적 얽힘들을 표현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까. 음악이 너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흐르는 대목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꼭 전자 악기의 소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쿠스틱 악기라 해도 배음을 적절히 이용한다거나 연주법들을 조금 비정상적으로 적용시킨다거나 하여 꼬인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것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O.S.T에 실려 있는 음악들은 훌륭하다. 특히 7번 트랙 <회상>은 들을 만하다. 서정적인 전반부를 지나 어느덧 후반부는 그동안의 한국 영화음악에서 볼 수 없었던 묘한 분위기로 빠져든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