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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노장, 그들이 돌아왔다
2001-04-25

비지스의 멜로디 감각이 돋보이는 새 앨범 <This Is Where I Came In>

<This Is Where I Came In>| 유니버설 발매

요즘 영미 팝은 확실히 소강국면이다. 젊은애들이 하는 록은 어딘지 맥이 빠진 듯하고 핵심이 없어보인다. 백 스트리트 보이즈 같은 맹탕들이

뻔한 상업음악으로 춤이나 추고 있고 그나마 조금 한다는 애들, 예를 들어 라디오헤드 같은 밴드의 음악조차 ‘종합적’이고 탄탄하고 깊이있긴

하나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모든 장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테크노를 중심으로 한 일렉트로니카나 힙합쪽에서는 계속하여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가 나오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의 소강국면은 ‘록’ 장르의 피로 현상과 맥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이

길어지기에는 록이 너무 많이 착취당한 것이 사실이다.

재미난 것은 이러한 소강국면을 ‘틈타’ 노장들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 올해 그래미에서 활약한 스틸리 댄이나 조니 미첼 같은 70년대

거장들, 그리고 최근에 또다시 앨범을 낸 백전노장 마초 로커 에어로스미스 같은 밴드의 활약은 그들을 절대 한물간 늙은이들 취급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더군다나 노장들은 어딘지 힘찬 기세를 품고 있다. 사실 젊은애들 음악에서 딱히 새로운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관록있는 사람들의

중후함이나 안정감에 귀가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최근 발매되는 노장의 음악들은 그 당연함 이상의 어떤 것을 전해준다.

이번에 새로 음반을 낸 비지스의 음악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비지스는 확실히 대단한 밴드이다. 그 누가 <Don’t Forget to

Remember>의 구닥다리 비지스에서 <Night Fever> 같은 디스코 비지스가 나올 것을 예상했겠는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감상적인 보컬이 엽기적인 팔세토 창법으로 변했다. 그들이 대단한 것은 당대의 스타일을 서슴지 않고 당겨와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쪽팔려하는 것도 없이 그냥 갖다가 취했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성공배경에는 이 형제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발휘해온

놀랄 만한 멜로디감각과 팝적인 균형감각이 있다. <Holiday>나 <Tragedy>의 멜로디는 팝 사상 길이 남을,

간단하고 애수에 찬 비지스풍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새 앨범에서도 그러한 멜로디감각은 죽지 않았다. 아무도 흉내내기 힘든 간단명료함을 소유한

이들의 멜로디 라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앨범 재킷에는 이들의 현재 모습은 스쳐지나가는 사진으로 처리되어 있고 데뷔 시절로 보이는 옛날 사진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다. 이번 앨범이

마치 그쪽을 향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확실히 노래를 들어보면 그쪽에 더 주안을 둔 것 같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당연한 비지스’ 이상의 어떤 것이 이 앨범을 통해 발휘되고 있음을 첫곡 <This Is Where I Came In>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운드의 처리는 또 한번 당대적이다. 그래서 그 옛날의 비지스 같으면서도 그 바깥에 있다. 어지러운 노이즈로 시작하다가

절도 있는 통기타로 압축되어 ‘과거’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 이 노래의 멜로디는 얼터너티브 록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옛날의 비지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고서 생각하면 얼터너티브 록의 핵심은 멜로디였나 싶다. 사실은, 특히 브릿팝의 경우는 더더욱, 멜로디가 중요한 음악이었다. 곡의

중간부터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드럼 사운드는 점차 그들의 ‘과거’로부터 사운드를 끌어내어 현대화한다. 컴퓨터로 처리한 드럼 소리는 아니지만

강력한 이펙터 처리를 통해 랩을 씌우듯 인공화하는 작업을 거친 소리다.

두 번째 곡 <She Keeps On Coming>은 어떤 면으로는 토킹 헤즈의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툭툭 끊어지는 울림을

가진 노래이다. 이게 비지스인가 싶다가도 멜로디의 성격상 다시금 비지스로 돌아가는 묘한 곡이다. 그러면서 다음 곡부터는 점차 비지스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앨범 후반부에 이르면 다시 <Don’t Forget to Remember>의 비지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스트레이트한 이들 모습으로 귀환한다. 그렇지만 그 여정의 이곳 저곳에서 ‘현재형’의 사운드에 대한 이들의 민감한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우스 스타일에서 옛날풍의 떨림 소리를 가미한 사운드까지, 여러 색깔을 섭렵하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더이상 겪을 것이 없어보이는,

이제 달관한 팝의 귀신들이다. 이러니 혁명의 시대가 아니면 아이들이 노인네들을 당할 재간이 없다. 노인네들 노는 꼴이 보기 싫으면 다시

한번 다 때려부수는 치기로부터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째 요새 영미 팝을 하는 애들은 그럴 꼬락서니가 안 보인다. 머저리 같은

양아치들 데려다가 앞줄에 세우고 떼춤이나 추게 만드는 꼴이 보기 싫은 친구들은 고개 숙이고 있기 일쑤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