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악(打樂)의 명인 김대환(1933∼2004)은 여섯개의 북채를 한꺼번에 쥐고 연주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인물이었다. 김대환이 무언가를 두드리면 이내 후드득 비가 떨어진다는 전설이 있으니, 그의 호도 흑우(黑雨)다. 쌀 한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넣은 세각(細刻)의 달인이기도 했던 흑우에 관해 도올 김용옥은 말했다. “왕희지의 서법보다 더 자유분방한 그의 작품 앞에선 타이베이 고궁 속의 세각도 빛을 잃는다.” 1990년 세계 기네스북에 실린 이 비범한 사건은 타악 연주와 무관하지 않다.
“전혀 상관없는 분야인 듯 보이지만 소리 찾기와 세각은 내게 있어 하나다. 목판을 파고드는 칼끝의 사각사각하는 소리는 내 귀의 미세한 감각을 살려냈고 소리의 세계를 더 깊고 풍요롭게 했다. 뇌성벽력에서 이슬방울 굴러가는 미음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소리, 무질서한 감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것을 북소리로 구현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하늘만이 허락하는 경지에 도달한 흑우는 평생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연습에 매달리는 ‘장엄한 구도의 길’로 일관했다. “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쳤기에 연습에 골몰했다. 트럼펫이든 드럼이든 아무리 이를 악물고 연습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위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럴수록 독종이 되어갔다. 밤무대를 뛰고 오면 새벽 3시. 하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악기 창고로 들어갔다. 후배에게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워달라고 부탁한 뒤 날 새도록 드럼을 두들겼다.”
‘모든 박자는 일박(一拍)에 통섭(通涉)된다’는 음악 철학에 도달한 흑우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2004년 1월16일 한성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한완상 총장에게 이런 축사를 들었다. “실로 도사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자기가 도사인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작업이 한낱 손놀림이 아니라 기쁨의 고통이요, 깨달음의 수행이었다.”
2004년 3월2일 세상을 떠난 흑우의 1주기를 맞아 그의 어록과 자전적 기록을 정리해 펴낸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철학자 흑우의 말 한마디. “북은 때리는 게 아니라 울리는 것이다. 북을 때리면 가죽이 채를 밀어내고, 북을 울리면 가죽이 방망이를 껴안는다. 가죽을 잘못 다루는 사람이 북을 치면 제아무리 굵은 채라도 부러지고 마는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