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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에 대한 진지한 사고
2001-07-12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실체를 조명한 <움직임의 미학…>

모린 퍼니스 지음·한창완, 조대현, 김영돈, 곽선영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 2만4천원

애니메이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90년대 초, 보고 싶은 작품 구하는 것 못지않게 힘들었던 것이 쓸 만한 전문서적을 구하는 것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단편을 구하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일본의 극장용 장편도 해적판 비디오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니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다룬 전문서적을 만난다는 것은 사실 지나친 기대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94년 히로시마에서 지아날베르토 벤다치가 쓴 <Cartoons:One hundred years of cinema animation>을 구했을 때의 설렘과 희열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런 기억에 기대어보면 최근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애니메이션 관련 저술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양적으로 10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진 요즘, 시중에 나와 있는 애니메이션 서적을 살펴보면 대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업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이 펴낸 이론서들이다. 캐릭터는 어떻게 설정하고, 동화는 어떻게 그리고, 타이밍은 어떻게 계산하고 등등 TV 시리즈나 극장용 장편의 제작에 사용하는 실무적 제작 기법을 시시콜콜 소개한 책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나 국가, 또는 연대별 필모그래피를 중심으로 정보와 감상론을 동시에 다룬 이른바 ‘인상주의 비평서’들이다. 작가의 이력에 대한 자세한 정보(대개는 일본 애니메이션)를 소개하고 감독을 비롯한 캐릭터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등 제작 스탭들의 작품 편력까지도 다루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두 부류의 책들이 나름대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한 산업적 모델이나 수용자적 관점이 아닌 좀더 깊이있는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이들에게는 많은 아쉬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움직임의 미학…>은 그동안 국내에 나왔던 애니메이션 책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이 책은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왜 그렇게 만들었고 그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에 대해 분석을 시도하는 책이다.

책의 부제인 ‘애니메이션의 이론, 역사, 논쟁’이 암시하듯 <움직임의 미학…>은 애니메이션의 사적 고찰, 제작기법, 작품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애니메이션이란 한 예술 장르의 실체를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애니메이션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서술 방식은 기존 책들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거창한 이론적 전제- ‘정치경제학적 접근’이나 ‘기호학적 분석’ 등등- 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스튜디오 제작시스템의 형성’, ‘대안적 애니메이션 제작 양식’, ‘사운드와 구조 디자인’, ‘고전시대의 디즈니 스튜디오’ 등 이슈와 주제가 분명한 보편적인 테마를 앞세우고 있다. ‘풀 애니메이션과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3D 애니메이션’처럼 실무적인 이론서에서 단골로 다루는 테마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단순히 평면적인 소개나 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고전시대의 디즈니 스튜디오’를 통해 당시의 전형적인 애니메이션 내러티브 구조와 검열 방식을 분석하고 있고, ‘풀 애니메이션과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비교에서는 두 기법의 미학적 차이와 미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흐름이었던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의 등장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대안적 애니메이션 제작 양식’에서는 셀 애니메이션 외에 컷아웃과 콜라주, 핀보드, 모래 애니메이션, 스트라타 컷과 왁스 등 다양한 제작기법이 지닌 미학적 가치와 창작의 특성을 작가들의 생생한 육성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사실 <움직임의 미학…>은 무척 방대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애니메이션이란 한 테마를 다루면서도 사적 고찰에서 미학적, 사회·경제학적 분석을 하는가 하면 수용자와 제도적 규제, 심지어 정치적인 영향에 대한 접근도 하고 있다. 따라서 솔직히 이 책은 애니메이션을 그냥 편하게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다만 애니메이션을 보고 즐기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의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이들에게는 다양한 시각과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일독(一讀)을 권한다.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