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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한 속삭임
2001-10-04

비욕신보 <Vespertine>

비욕은 솔직히 부담스러운 뮤지션이다. 사람을 당혹케 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외모와 비규범적인 발성과 경탄스퍼운 이미지(연출)과 평범하지 않은 팝송들 모두에서 발휘되는 힘. 그 힘의 총체로서, 말하자면 비욕은 무대 위의 이미지를 일상의 그것에까지 감히 확대 적용해볼 만한 몇 안되는 뮤지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이 그녀가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한 영화 <어둠 속의 댄서>(의 성공) 이후 증폭되었으면 됐지 결코 덜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번 신보 <Vespertine>에 대한 기대였다. 이 기대는 긍정적일 수도 있었지만, 또한 여러 가지 정황상 에고(ego)의 과잉을 염려하게 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또 어떤 깜짝 놀랄 '비욕다운' 짓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할까, 아마 이제까지 가장 뻑적지근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그리고 앨범이 공개되었다. 기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일정한 송라이팅 파트너/프로듀서와 1:1로 더불어 적업해온 전통을 떠나 좀더 자신이 주도하는 앨범을 만들었다. 아마 처음으로 그 가능성이 시도되었던 <Selma Songs> 앨범(<어둠속의 댄서> 사운드트랙) 이후의 자신감일 것이다. 그러나 비욕다운 성깔을 기대한 사람에게 이 앨범은 그 전혀 설치지 않음으로 인해 꽤 세게 때리는 앰비언트 뒷통수가 된다. 그녀오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기고만장해도 좋았을 앨범이, 의외로 가장 은근한 앨범으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정말로 흥미롭다면 그것은 이 앨범이 사운드상으로 '비욕의 앰비언트'라기보다 총체적으로 '비욕의 상징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징은 다름아닌 Vespertine, 즉 저녁 어스름의 모든 것이다. 밤(정지)이 아니라 저묾(진행)을 택함으로써 이 앨범은 부동적인 듯 하면서 유동적인 콜로이드의 움직임처럼, 불규칙적인 곡선-직선-면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의 아트워크와 타이포(typography)가 유도하는 질서있게 혼란한 동선의 움직임까지 유도해낸다. 그런가 하면 하프와 함께 <Frosti>를 비롯해 앨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뮤직박스(오르곡) 사운드는 전통적으로 최면 혹은 자장가의 연상 기제가 돼왔다. 또한 고래로 낮과 밤의 경계에 선 새벽, 혹은 고독과 운둔의 상징으로 읽히는 백조라는 새는 이 앨범에서 그녀가 입은 그레스와 오버랩되면서 가장 의미심장한 심상 중 하나가 된다(실상 부클릿만 보아서는 새벽/일출의 상징인 백조와 '천개의 눈을 가진 밤'을 닮은 깃털을 가진 공작의 중간쯤 되는 다소 모호한 모습인데, 비욕이 입은 드레스의 제작자인 디자이너 마리안 페요스키가 원래 이 조류 테마의 의상 시리즈를 기획했을 때 공작과 타조, 거위를 주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은 짚어볼 만하다).그리고 이런 상징들을 곡들고 연계해서 들어보려는 노력이 이 앨범의 감상을 극히 자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다이내믹한 것을 바랐던 비욕 팬이라면 거의 "비 맞은 중이냐"라 할 만큼 도통 소곤거리기만 하는 낙차 적은 곡들이지만, 조금만 각도를 틀면 이 소곤거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렁차다. <Vespertine>은 아마 비욕의 앨범 중에서 가장 시(時)적이며 가장 추상적이며 가장 유기적이며 가장 폐소공포증적이며 가장 덜 싱글-마인드적인(그러니까 single-minded가 아니라 싱글 커트 목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앨범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컨셉트 앨범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Pagan Poetry>만큼은 그 컨셉트에 한 가닥 배신을 대리는 훌륭한 싱글 후보로 지목될 만하다.)성문영/팝음악애호가 montypyth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