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그가 정말 `광주의 피`를 노래했단 말인가?
2001-10-04

장정일 <상복을 입은 시집>

미로찾기 놀이가 있다.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쓰게 만드는 게임디아. 직사각형 모서리에 입구와 출구가 그어져 있고 그 사이는 복잡하게 꼬여 있는 미로들이다. 잔수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를 거꾸로 풀 것이다. 입구에서 시작하면 갈래가 많아서 까다롭지만 출구에서 시작하면 금세 풀린다정반대의 미로가 있다. 작가들이다. 작품 목록표의 역순으로 짚어가면 영영 풀리지 않는 미로들이다.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읽어보셨는가. 따뜻하가. 그런데 그가 20대 초반에 '안재찬'이라는 본명으로 쓴 불가사의한 언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튼... 그때 그가 몸담았던 '시운동' 그룹 중에 이륭이 있었다. 자괴와 초월과 불멸의 언어를 분출하다가,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한라산>을 발표함으로써 '이산하'가 된 시인. 이 시인의 최근작을, 단아하고 뼈아픈 언어로 산사의 정경을 한폭에 담아낸 시를, 그 당시 젊은 작품과 연관하여 거꾸로 읽으면 복잡한 미로가 된다.그렇다면 장정일은 어떤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 일련의 소설들. 하지만 초기 활동의 대부분은 시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소설책이 있지만 그래도 이십대 초반의 장정일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의 시인이었다. 이 시집으로 '김수영 문학상'도 받았다. 이후 그는 안재찬이나 이륭에 비해 수미일관하였다. 하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수록하지 않은, 펄펄 뜨겁게 달아올랐던 때의 미발표작을 엮은 <상복을 입은 시집>을 보자. 이 시집이야말로 장정일의 모든 작품 목록 중에 가장 '비장정일' 적이다. '광주의 피여/ 강은 돌아오지 않지만/피는 돌아온다'고 장정일은, 그때, 썼다. 시집 앞머리에 '이 땅의 민주화 투쟁을 위해 숨져간 분들께 약소한 이 시집을 바칩니다.'라고 적혀 있다. 가장 '비장정일'적인 시집이지만 그러나 한편씩 간추려 읽다보면 이 시집이야말로 이후 장정일의 모든 요소를 집약하고 있다는 점, 더욱이 수많은 '포스트모던 보이'들 가운데 왜 유독 장정일만큼은 '가짜'의 혐의로부터 일찍이 자유로웠는지를 선명히 알 수 있다. 생경하면서도 격렬하다. 뜨거우면서도 착잡하다. 인생의 빈틈을 향해 농담까지 던진다. 완존히 장정일이다.정윤수/대중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