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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도 희망은 보이지 않네
이다혜 2007-04-12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해냄 펴냄

“신의 가호를 빌어봐야 소용없소, 원래 신은 날 때부터 귀머거리거든.” 우리는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간다. 안과의사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눈이 멀었던 곳으로.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 이후 4년 뒤의 시점에서 눈먼 것보다 더 거대한 암흑 세상을 보여준다. 전작의 주인공들은 아주 느지막이 무대에 재등장하지만, 막연한 희망을 느낄 여지는 점점 사그라든다.

백색 실명이라는 희귀한 전염병이 있었던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선거일. 수도에서는 과반수가 넘는 백지투표가 정치가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다시 선거가 실시되지만 이제 백지투표율은 83%로 올라간다. 이전과 다른 형태의 백색공포에 질린 것은 정치가들뿐이지만, 권력을 쥔 대통령을 포함한 수뇌부 인사들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다. 그리고 수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끊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정상적인 것 이상으로 자치에 성공하려는 듯 보인다. 여러 계략에도 불구하고 백지투표의 원인 규명은커녕 대책조차 제대로 강구하지 못하던 와중에, 투서가 날아든다. 4년 전에 눈이 멀지 않았던 여자가 한명 있다, 그녀가 이 반정부주의적이고도 기이한 사태의 원인이 아니겠느냐는 내용이다. 내무부 장관은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경찰 셋을 수도로 보낸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은 사람이라면 백색 암흑, 백색 절망의 그 아수라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는 그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대항하고, 투표권을 가진 수도의 사람들은 가장 민주적인 의사표현 방식인 백지투표를 던지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도 열여덞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재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건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사라마구는 이러한 ‘현실’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파국을 재치있고도 음울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전작에서 만난 적이 있는 선량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희망을 가져올 수 있을까. 밥그릇 싸움도 모자라 악화를 양화라고 믿는 정치가들에게 깨달음이란 있는가.

전작보다 온화해 보이는 듯하지만 더 현실적이고 비관적으로 읽히는 <눈뜬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어디에라도 적용되는 기이한 우화다. 눈물을 핥아주는 개와의 재회에 기꺼워하기에 파국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꼭 눈이 멀었을 때에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게 아니다. 그 사실에 눈을 감고 매일 현재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