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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더럽고 적나라한 빨랫감
이다혜 2007-06-28

<불릿파크> 존 치버 지음/ 문학동네 펴냄

교외지역에 사는 중산층 주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는 “누구나 더러운 빨랫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위기의 주부들>이 더러운 빨랫감들을 고급스런 패션과 화려한 연애행각들로 눈속임해 보여주었다면, 존 치버의 <불릿파크>는 아무것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도 탈현실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외계의 존재가 등장하지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지만, 인물들의 삶은 탈현실적이다.

불릿파크는 시내로 통근이 가능한, 화이트칼라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불릿파크에는 엘리엇 네일즈와 그의 아내 넬리, 그리고 그들의 십대 아들 토니가 살고 있다. 이들의 삶은 겉으로는 어느 곳 하나 어그러진 곳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은 잔뜩 녹슬어 있다. 네일즈는 오로지 아내를 위해서만 육체적으로 흥분하는, 자의 반 타의 반의 일부일처제 신봉자이며, 넬리는 다른 남자를 보고 흥분한 적이 꽤 있었음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졸지에 결혼생활에 충실한 주부다. 이들의 아들 토니는 베이비붐 세대 중산층 외아들로서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물질적 풍요와 안정은 그에게 어떤 버팀목도 되어주지 않는다. 여기에 폴 해머가 등장한다. 해머 부부는 불릿파크로 이사와 네일즈 부부와 친구가 되는데, 해머는 세상을 일깨우기 위해 감동이나 가치없이 살아가는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교회 문에 십자가처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대가 되는 불릿파크는, 더없이 평범하지만 공허하고 위태로운 현실의 한켠이다. 네일즈는 자문한다. “나는 중절도죄로 기소된 적이 있는가? 아니, 공원에서 살해당한 적이 있는가? … 그렇다면 어째서 좀더 쾌활해지지 않는 거지?” 그에게 필요한 건 용기지만 용기는 체육관에서 기를 수도, 우편 주문 상품으로 주문할 수도 없다. 돈이 있어도, 가족이 있어도, 건강해도, 이상하게 행복은 점점 멀어져간다. 외양은 부풀어오르지만 본질은 풍선이라 뾰족한 모서리에 닿으면 언제라도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아슬아슬한 현대인의 삶 그 자체다.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 더이상 믿을 수 없으며, 부모와 자식간의 거리감은 아득해 소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책이 처음 발표된 1969년과 지금, 정서적인 면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은 섬뜩할 정도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탈현실적으로 구사하는 힘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리처드 브라우티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치버는 미국에서는 레이먼드 카버 못지않게 유명한 단편소설가로, <존 치버 단편집>은 퓰리처상 소설부문, 전미 도서비평가협회상,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비평적, 상업적 성공의 정점을 가져다준 단편집도 올해 말 출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