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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원리주의의 야만을
2001-10-25

프랑스 만화가 엥키 빌랄의 <야수의 잠>

엥키 빌랄(Enki Bilal·프랑스·1951∼)의 만화는 SF이면서 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면서 실존을 이야기한다. 그가 보여주는 시각 이미지의 탁월성은 이미 몇편의 전작들, 특히 우리나라에 출판된 <니코폴> 3부작으로 확인되었다. 엥키 빌랄은 체코인 어머니와 보스니아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유고 베오그라드에서 자라다 10살 때 프랑스로 건너왔다. 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것에 대한 미묘한 감수성은 바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발칸에서 시작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발칸적 감수성’이 될 것이다. 1972년 <필로트>(Pilote)로 데뷔한 뒤 1980년 시나리오 작가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한 <신들의 카니발>(La Foire aux Immortels)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여인의 함정>(La Femme Piege)과 <적도의 추위>(Froid Equateur) 3부작으로 이어지며, 1995년 <니코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니코폴>은 현실과 환상이 복합된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집트 신들이 등장하는 판타지이자, 미래사회를 그린 SF이며, 우리의 삶이 투영된 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정치와 이데올로기, 언론과 대중조작, 사랑과 믿음이 미묘하게 교차하며 현실적인 울림을 만들어낸다.

SF를 통해 이야기하는 과거와 오늘

<야수의 잠>(현실문화연구 펴냄)은 엥키 빌랄의 신작이다. 모두 3부작으로 기획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부가 출판되었다. <야수의 잠>은 옛유고연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기독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조직한 몽매주의 교단이 등장한다. 주인공 나이키 아트스펠드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작품 도입부에 시작된 18일째의 기억은 작품 말미에 태어나던 날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나이키는 자신이 태어난 코세보 병원에서 며칠 차이로 태어난 세명의 아이들을 기억한다. 나이키는 가장 먼저 태어난 맏이로 그들을 언제까지나 지켜줄 것을 맹세한다. 나이키를 포함한 세 아이들이 <야수의 잠>의 주인공이다. 아미르는 모스크바에서 애인 사샤와 함께 살고 있다. 사샤는 몽매주의 교단의 처단자 부대와 계약하고 동부 시베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둘은 파리(진짜 파리와 똑같이 생겼다)를 통해 몽매주의 교단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아미르만 파리를 죽이고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장 늦게 합류한 레일라는 관측위성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로 네푸드 사막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다. 천체관측 우주선 허블 4호에서 근무하는 인물로 외계로부터 온 무선음을 분석하는 암호명 독수리사이트에 관계된 민간인이다.

작품 도입부에서 인터뷰를 끝낸 기자가 나이키에게 묻는다. “당신은 세르비아인인가요, 크로아티아인인가요, 아니면 회교도인?” 인터뷰를 끝낸 나이키는 뉴욕에서 애인 파멜라와 만난다. 나이키와 이야기를 하던 파멜라에게 기관총을 든 부대가 나타나 총을 쏘아댄다. 몸이 두동강난 파멜라는 인간이 아니라 복제였다. 코를 다쳐 병원에 누운 나이키는 코베아 중위를 만나고, 그에게 다시 “세르비아인인가요, 크로아티아인인가요, 아니면 회교도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작품의 도입부에 두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질문은 나이키가 맞서야 하는 ‘적’의 실체를 암시하는 복선이자 <야수의 잠>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인간의 정체성을 민족과 종교로 판단하려는 원리주의에 대한 작가의 경고이자 90년대 후반 발칸 반도를 휩쓸었던 야만에 대한 문제제기다.

비극의 징후들

엥키 빌랄의 작품은 미래에서 시작하고 환상적이고 가상적인 설정이 등장한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늘 과거로 돌아와 현재로 회항한다. 시각적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흔히 SF가 차용하는 관습적인 이미지들 대신 노란 뉴욕 택시가 하늘을 나는 식으로 독특한 이미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라는 거대한 회랑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움직임을 조망하는 느낌을 받는다. 문제의 근원인 몽매주의 교단이 일어나게 된 세계사의 설정을 보면 마치 오늘의 현실이 극단적으로 진행되었을 때의 미래를 보는 느낌이다. 몽매주의 교단은 21세기 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핵재앙이 일어나고 마피아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광신적 경향에서 태어난 교조주의적 이단파들이 아프리카 마피아와 지하 금융가의 지원을 얻어 결성한 교단이다. 2018년이 되자 이단자를 처형하기 위한 처단자 부대가 조직되고, 파키스탄의 신탈레반주의가 아프리카와 지중해로 확산되었으며, 2022년부터 몽매주의 교단의 자살테러가 일어났다.

만화와 영화를 함께 만드는 작가인 엥키 빌랄에게 만화와 영화는 동일한 세계에 속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치밀하고 사실주의적이며, 대사는 많고 복잡하며, 미장센은 꽉 채워져 있다. 그의 만화는 몇번을 읽어도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최근에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과 엥키 빌랄의 <야수의 잠>을 통해 ‘테러와 보복’이라는 비극적인 징후들을 발견했다. <야수의 잠>에서 경고한 몽매한 원리주의의 공포와 조종되는 인간의 허무함, 파괴된 20세기의 유산인 에펠탑, 이 보여주는 미디어에 의해 범인으로 조작되는 간지와 인류의 구원자로 등극한 친구. 하얀 가루를 이용한 테러까지. 9월11일 이후 여러 독서를 통해 발견하는 비극의 징후들과 마주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