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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마흔을 넘기 전에
2001-11-01

<로보트 태권 V>

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 유유히 살아남아 있는 문화적 코드는 ‘복고(회기)’와 ‘엽기’다. 그런 코드의 주기가 상당히 짧게 변화하는 문화시장 속에서도, 이 두 요소는 꽤 장시간 동안 그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요 근래 한국에서 성공한 문화상품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복고’라 불릴 수 있는 부분은 ‘엽기’적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하위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인기 웹영화나 CF 등에서 보이는 복고 이미지들은 다분히 과장적이고 작위적인 형태로 쓰이고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즐기는 것이 현대인의 취향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이렇듯 ‘엽기적 복고’가 자주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제대로 된 ‘복고’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료부족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이나 유럽의 대부분의 장수 미디어상품이 대중과의 꾸준한 접촉을 통해 그 생명력을 연장하고 파워를 다져온 데 비해 국내에서는 수없이 뿌려진 미디어 씨앗들이 점점 잊혀진 채 버려지고 있다. 수차례 복간과 재발행이 이뤄지는 해외 유명작가의 작품에 비해 국내 작품들은 원본은 물론이거니와 그 당시 발행된 책자조차도 찾기가 힘든 지경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복고’의 가치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태권V>의 ‘부활 프로젝트’가 지연된 가장 큰 이유도 ‘붐’ 조성에 필요한 재료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원천이 돼줘야 할 원작의 필름조차도 소재가 파악된 것은 몇개 안 되고, 대부분은 녹이 묻어 상영이 불가능한 상태이거나 상영 당시 편의에 따라 몇분씩 잘려나간 것들이었다. 80년대 출시되어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고 있는 <태권V>의 비디오 테이프는 중간중간 수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가 처음 본 사람이라면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모를 정도인데다가 화질과 음질이 굉장히 조악하고 손상돼 있다(그 당시 비디오 제작 야사를 들어보면 텔레시네 하는 비용과 시간을 아끼려고 필름을 하얀 벽면에다가 상영해놓고 그 장면을 찍어 비디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짤막짤막한 영상만 가지고 일반 대중에게 그 당시의 감동을 되살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질 못했다.

얼마전 <딴지일보>에서 제작한 <태권V> 복원 CD-ROM이 출시됐다. 최초에 얘기된 VCD포맷이 아닌지라 집에 있는 DVD 플레이어를 이용해 큰 화면에서 감상하겠다는 ‘계획’은 아쉽게도 무너졌다. ‘화질이 기대보다 안 좋다’든지 ‘극장에서 본 장면이 없다’든지 하는 불만의 목소리들도 없는 것이 아니지만, 앞서 말한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 심지어 해외에서 출시된 비디오 테이프까지 모아 원래 상영시간을 최대한 되살렸고 그 당시 제작진의 인터뷰나 스크립 등의 자료를 수록한 노력이 <태권V>라는 작품의 생명기간 연장에 큰 도움을 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디어상품에 대한 복고 주기는 20∼30년 사이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한 세대를 가르는 주기와 거의 일치한다. 즉 당시 작품을 접한 아이가 안정된 지위를 가지는 성인이 되는 데 드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1976년에 상영된 <태권V> 1탄을 보고 감동한 아이들은 이제 30대 중반의 직장인들이 되어 있다. 이 계층이 40대가 되기 전에 승부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태권V>는 몇몇 마니아를 위한 수집 아이템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인 <사이보그009>의 3번째 TV시리즈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야말로 그 나라 문화산업의 기반을 지탱하는 요소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