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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척하는 세상에 어퍼컷을 날리다, <레제르> 1, 2장
김경우 2008-01-24

살다보면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욕망이 들 때가 있다. 이를테면 만원인 엘리베이터에서 방귀를 뀌고 후다닥 뛰쳐나가고 싶다든지 좋아하는 이성이 앉았던 의자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싶다든지 막 페인트를 칠한 벽에 손도장 쿡쿡 찍고 도망가고 싶다든지… 뭐 이런 욕망 말이다. 물론 입 밖으로 냈다간 ‘천하에 유치한 변태’ 취급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거치게 마련이다.

혹시 이런 욕망들을 표출하지 못해 답답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제르>는 생면부지의 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울 작품이다. <레제르>는 프랑스의 풍자 만화가 장 마르크 레제르의 모든 만화를 총망라한 작품집으로 이번에 A4의 큼직한 판형으로 2권이 새로 출간되었다. 짐작했겠지만 이 작품집에는 앞서 이야기한 그런 욕망의 표출이 그득하다. 소개하자면 이런 식이다. 작품 중 <지저분한 뚱땡이>의 주인공은 냄새나고 뚱뚱한 백수인데 남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자신은 그런 남들을 비웃는다. 맹인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그는 맹인의 중요한 부위를 정성껏 쓰다듬어주고 간다. 재미있는 건 맹인의 반응. “오! 이렇게 매일 그곳을 만져주다니 고맙기도 하지. 분명 그녀는 가슴도 마음도 빵빵한 미녀일 거야.” <끝내주는 세상> 중에서도 한편을 소개하자면 한 마을의 우체국에는 할 일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그득한데 사실 그 이유는 우체국에 바글거리는 미끈한 여자들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노인들은 혹시 파업으로 우체국이 문 닫을 것을 걱정하며 ‘직원들의 요구를 수용하라’란 구호와 함께 파업에 동참한다. 중요한 것은 레제르가 이런 방법으로 고상한 척하는 사회를 통쾌하게 ‘까댄다’는 점이다. 레제르가 살았던 1960~70년대의 프랑스는 군인이었던 드골이 정권을 잡았던 시절이고 프랑스답지 않게 언론과 소통의 자유가 억압되어 있던 시대였다. 영혼이 자유로운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위선과 억압이 가득한 현실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었고 레제르는 그 답답함을 풍자 정신이 가득한 만화로 표출했다. 1983년 42살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쉴새없이 펜을 놀린 그 덕분에 수많은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대리만족일지언정 통쾌함을 느꼈으리라. 결국 그는 만화란 매체가 사회에 대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을 보여준 셈이다.

레제르가 살아 있어 같이 술 한잔 할 수 있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저질스런 유머를 주고받다 보면 정말 술이 맛있게 넘어갈 것 같은데. 혹시 옆자리에서 “쟤들 뭐야”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면 이렇게 비웃어주며 말이다. “왜 난리야? 혼자 있을 땐 자기도 그럴 거면서, 킥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