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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수 거품처럼 끈적이는 인간의 불쾌한 욕망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다혜 2008-03-06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이언 매큐언의 데뷔 초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편집이다. <암스테르담> <속죄>와 같은 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들이 이미 소개된 상태에서 새로 읽는 그의 이 소설집은 거칠고 끈적거리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혐오로 가득하다. 성인이 되고도 소년 시절의 철없음을 루저 정서에 맞물려 웃음을 끌어내는 닉 혼비와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이언 매큐언은 꿈꾸지 않는 청춘 군상을 부려낸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의 주인공들은 곧게 응시하기보다 고개를 돌려버리게 만드는 일그러진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데, 그 과정은 주인공들에게도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결코 녹록지 않다.

<나비>의 화자는 난생처음 시체를 봤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운하 위를 따라 뛰는 소녀를 봤다. 어린 제인이 익사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그는 ‘용의자로 찍힐 만한 인상’의 소유자다. 제인의 사건을 담당한 형사도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소녀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몸을 씻고 옷을 입던 그는 자기 몸에 남아 있는 비누향을 맡는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에서 그 모든 잃어버린 시간의 실마리를 붙들었듯이, 매큐언은 이 비누 향이 연상시키는 ‘그 오후’로 시간을 돌린다. 소녀는 그에게 말했었다. “아저씨에게서 꽃 냄새가 나요.” 처음엔 소녀가 그를 따라왔다. 독자는 그제야 불쾌한 각성을 얻는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소녀의 따뜻한 달콤함이 어떻게 그를 어두운 동굴 안으로 잡아끄는지 보여준다. 있을 리 없는 나비와 음습한 운하 주변의 풍경 속에 사타구니에서 늑골까지 솟아오르는 쾌감은 그를 몰아붙인다. 그가 소녀와 보낸 오후가 진술서에 쓴 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폐수 거품처럼 끈적이는 분비물처럼 소설이 끝나고도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가정 처방>은 자위를 배워 세상을 반쯤 얻은 듯한 기분이 된 소년이 동정을 떼기 위해 여동생과 ‘엄마 아빠 놀이’를 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신체부자유자인 남자가 엄마와의 끔찍한 생활 끝에 요양소에서 안정을 찾는 듯하다가 사회로 내보내지면서 겪는 일탈의 시간을 그린다. 그들의 삶은 정상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해보이던 평범한 오후, 작은 결심,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 때문에 자기 안의 어둠으로 줄달음친다. 해피엔딩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언 매큐언은 이 소설집으로 ‘Ian Macabre’(소름끼치는 이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옵저버>는 “학교 선생처럼 생긴 사람이 글은 악마처럼 쓴다”고 평했다. 저항하는 대신 사회와 함께, 썩은 강물처럼 같이 부패해가는 인물의 내면을 악마처럼 집요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