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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비추는 끔찍한 거울, <중국 근대의 풍경>

19세기 말 발행된 <점석재화보>를 중심으로 다양한 관심을 공유하는 학자들이 펴낸 <중국 근대의 풍경>은 ‘유리거울의 시대’에 비친 ‘구리거울의 시대’의 풍경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점석재화보>는 서구(타자)가 더이상 은유적 외부가 아니라 실재적 외부로, 머나먼 타자가 아니라 중국의 일상을 위협하는 직접적 육체성으로 전환되는 시대의 표상이다. 중국 근대의 비극은 상상 속의 타자와 현실 속의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세계는 탐미적 나르시시즘의 코드로 읽혔기에, 그 어떤 아름다운 타자가 노크를 해도 중국인의 구리거울에 비친 자아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구리거울에 비친 자아(전통) vs 유리거울에 비친 타자(근대)의 대결에서 승리는 점점 유리거울쪽으로 기울었다.

유리거울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보잘것없는 나와의 투명한 대면을 매개하는, 잔인한 미디어다. 중화주의·화이론적 세계관이 구리거울의 이미지라면, 만천하에 중국의 실상을 폭로하는, 대상의 모공과 흉터를 낱낱이 드러내는 유리거울의 이미지는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소환하는 방식이다. 중국은 구리거울 속에서 독야청청했던 중화의 세계가 무너지자 ‘타자(서구)의 시선에 비친 발가벗은 자아’의 끔찍한 이미지메이킹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야 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만국박람회에서 중국인이 일종의 ‘야만인’으로서 ‘인류학적 연구 대상’으로 전시된 사건이었다.

유리거울 이미지는 거울과의 마주침을 통해 자신을 타자로 인식하는 충격적인 유체이탈의 체험이다. 중국인들은 유리거울의 투명성을 얻은 대신 구리거울의 모호성과 자기 충족성을 잃어버린다. 구리거울의 빛나는 명랑성과 낙관(조금 구부러진들 조금 지저분한들 어떠하리)은 유리거울의 가차없는 합리적 투명성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그러진 대로 희끄무레한 채로 자족하던 중국의 낙천성은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속도의 정치’로 빨려들어간다. 청일전쟁·중영전쟁(아편전쟁)을 몸소 겪어내고 러일전쟁을 목격한 중국은 더이상 구리거울의 순정한 판타지를, 타자없는 나르시시즘을 향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중국 근대의 풍경>이 결코 ‘그들의 실패한 근대’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중국을 투과하지 않고 근대를, 자본을, 세계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리거울의 자족적 세계를 폭력적으로 배제했던 중국의 근대는 동도서기론(동도로 서기를 흡수해야 한다는 절충주의)이라는 기이한 절충적 세계관으로 서양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서양의 기술과 정신을 분리해낸 것 자체가 치명적인 전략적 실패가 아닐까. 모든 것을 숫자로 계량하는 수량화혁명 자체가 서구 물질문명의 내재적 기반임이 분명한데, 동도서기야말로 중화주의의 또 다른 변종이 아닌가. 동도서기는 동도와 서기의 우성인자를 결합한 시너지효과가 아니라, 동도와 서기의 끔찍한 유전자 조합이 낳은 또 다른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