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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2001-11-15

윤태호의 신문연재만화 <로망스>

스포츠 신문은 오랫동안 한국 성인만화의 용광로로 존재해왔다. 고우영, 방학기, 배금택 등의 만화가들은 일반 만화시장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그 요새 속에서 “왔어요, 왔어요” 성인남자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욕망을 불끈불끈 솟구치게 해주었다. 물론 그들 작품의 질이 얼마나 견고한 수준을 유지해왔는가는 진지하게 들여다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그 오랜 생명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그들의 성좌를 넘보는 신선한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늦깎이 강주배는 <용하다 용해>로 무대리를 샐러리맨의 아이콘으로 만들었고, 정연식의 <또디>는 인기를 발판으로 경쟁지로 스카우트되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잡지만화계에서 스포츠 신문으로 발을 넓혀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누들누드>로 큰 명성을 얻고 있던 양영순은 <아색기가>로 제 물을 만났고, 개그만화계의 총아 김진태는 <시민 쾌걸>로 스포츠 신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만화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기말 참극 <야후>의 윤태호가 이 용광로에 뛰어들었다.

<이나중 탁구부>보다 뛰어난 3등신 캐릭터

새 스포츠 신문 <굿데이>에 연재중인 윤태호의 <로망스>는 본격적인 노인 개그만화다. <야후>의 윤태호는 한 젊은이의 삶을 뒤바꿔버린 대재난과 맞서는 정말로 진지한 만화가이다. 하지만 전작인 <연씨 별곡>에서부터 그의 풍자와 개그 감각은 소문난 것이었고, <수상한 녀석들>에서 다소 허무하게 바람이 빠졌지만, 다시 <로망스>로 옹골찬 개그의 알맹이를 채워나갈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감히 노인 어르신들을 이 자리에 모셔온 게 아니겠는가? 이 가공할 한국사회는 ‘노인’이라는 문제를 건드리기 위해 만화가에게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 위험을 덮어씌우기 위해 만화가는 재치와 유머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당한 효도 홍보만화로 박카스 선물을 받거나, 탑골공원에서 멀지않은 신문사를 불지르게 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로망스>는 먼저 캐릭터의 파격으로 돌진한다. 삼등신의 캐릭터는 만화에서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파티리로>나 <아기와 나>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어린아이와 연관되는 귀여움의 표상으로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로망스>에서 만나는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얼굴, 그리고 간략한 선을 사용하지만 강하게 새겨넣은 노년의 징후들은 그 귀여움의 느낌을 약간은 징그럽고 낯선 체험으로 이끈다. <이나중 탁구부>의 열혈 쓰에마쯔 선생이나 거대한 얼굴을 가진 하마 선생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기는 하지만, <로망스>쪽이 훨씬 완성적이고 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세월의 냄새를 숨기고 사는 노인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형적 파격이 어떻게 개개의 성격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을까? 월남전에 갔던 지루한 무용담으로 아기를 재우는 95% 대머리 노인, 공무원 정년 퇴임 뒤 정말로 무미건조하게 사는 평범한 노인, 이것저것 좋아하고 밝히는 것 많지만 먼저 간 집사람이 그리운 술꾼 노인,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어린 손주의 우유를 뺏어먹는 존재감 제로의 치매 노인…. 이들이 중심적인 인물군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전체를 휘어잡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에피소드 속에 가끔씩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에피소드 연작에서 굳이 몇 인물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것도 하나의 스타일로 존재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 주인공들의 개인사에 대한 조명이 비교적 자세하고, 무언가 그들이 전체적인 만화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40회 정도의 분량이라면 장기 연재를 해온 만화가로서는 아직 초반에 불과할지 몰라도, 스포츠 신문의 독자들은 매일 이 신문을 살까 저 신문을 살까 고민하는 일회적인 존재에 가깝다. 보통의 일간지에 비해 스포츠 신문 독자의 충실도가 확실히 낮은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가급적 빠른 타이밍에 독자들에게 만화의 성격과 주인공들을 파악하게 하는 다소 친절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똥침 마니아’와 같은 설정이 제법 감칠맛나는 웃음을 만들어내는데, 똥침을 무력화시키는 노인의 치질이 그의 개인사에 얽혀 들어가도록 하면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노인이 흘린 침은 고무줄 놀이가 되고

그럼에도 <로망스>는 다른 신문만화와 구별되는 확실한 개성과 성숙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사족을 제거하고 공간적인 구성으로 유쾌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매우 훌륭하다. 노인이 졸면서 흘린 침이 이리저리 엮어지더니 손녀딸과 함께하는 고무줄 놀이가 된다든지, 세월에 따라 변화는 섹스장면을 병렬식으로 엮어놓은 구성들은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아이디어의 전달도 명확하다. 그런 캐릭터와 공간 연출의 미덕이 어떻게 노인세계에 대한 경쾌하지만 치밀한 분석과 만나게 될까? 그 물음이 <로망스>를 열심히 보게 만드는 자양강장제다.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