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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타분한 위인전은 가라!
2001-11-22

<바다의 전설 장보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봐도 위인전을 재미있게 읽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성웅 이순신이나 헬렌 켈러를 읽으면서 경외감을 품기는 했지만 엄격히 말해 재미있었던 건 아니다. 자칫 딱딱하고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위인전은 그래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부담스러운 장르인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한혜진·안재훈 감독이 지휘하는 신작 한편이 있으니, 바로 플래시애니메이션 <바다의 전설 장보고>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해상왕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은 여러모로 보기 드문 프로젝트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른바 동시다발적인 프로젝트라는 것. 서울무비에서 진행중인 <바다의 전설 장보고>는 TV 시리즈와 플래시로 함께 진행되고 있다. 제목이 같은 두 시리즈는 그러나 전혀 다른 컨셉으로 펼쳐진다. TV 시리즈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스타일이라면, 플래시는 공식에 충실한 위인전. 그런데 고리타분하기 쉬운 후자가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웬일일까. 플래시 <바다의 전설 장보고>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청년 장보고가 해적을 무찌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위풍당당한 장보고를 보여주는 1화 프롤로그가 끝나면 시리즈는 그의 인생을 차례로 보여준다. 신라시대, 완도의 어느 바닷가에서 소년 궁복과 정년은 활쏘기 시합을 벌이고 있다. 궁복은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에 좌절하고 훗날 당으로 향하는 장보고. 정년은 장차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죽마고우다. 이들의 활쏘기 시합이 그런데 어쩐지 엄숙하지 못하다. 아니나 다를까. 정년이 과녁 대신 멧돼지를 맞추고 말았다. 사납게 달려드는 멧돼지. 두 소년은 이를 피해 요란한 질주를 시작한다.

등장인물의 아명까지 정확히 표현할 만큼 철저한 고증을 거친 플래시 <바다의 전설 장보고>가 고리타분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런 까닭이다. 어른조차 귀엽게 표현해내는 SD 캐릭터, 신체 부위가 코믹하게 클로즈업되는 파격적인 연출, 사투리와 유행어가 섞인 코믹한 흐름.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명랑하게 전하는 내레이션이라니.

신속한 이야기 진행 역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장보고는 5화에서 세력을 키워 활발한 무역을 시작하고, 7화에서 황번적의 우두머리와 맞선다. 금의환향한 그가 신라 흥덕왕과 대면하고 청해진을 정비하는 게 10화. 위대한 해상왕은 일체의 근엄함을 버리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오로지 역사적 사실에만 충실한 건 아니다. 치열한 권력다툼을 그리는가 하면 오늘날의 벤처정신을 장보고에게 대입하기도 한다.

총 26화로 구성된 플래시의 러닝타임은 매회 약 3분. 지난 5월부터 제작에 들어간 플래시 시리즈는 애초 역사에 근거하지 않은 본편 TV 시리즈를 보완하기 위해 기획됐다. 본편이 끝날 때 3분가량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TV 시리즈 방영시간이 계속 바뀌면서 독자적인 작품으로 서게 됐다고 한다. 현재는 5화까지 더빙을 끝냈고 13화까지 작업을 마친 상태. 서울무비는 플래시 시리즈를 따로 모아 특집극 형식의 방영을 추진하고 있다. 깔끔한 영상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고려하면 조만간 비디오로 나올 법도 하다. <히치콕의 어떤 하루> <순수한 기쁨>의 한혜진·안재훈 감독은 이 작품에서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어느 정도까지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직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서울무비 연필로 명상하기 홈페이지(http://www.mwp.pe.kr/index1.htm)에서 캐릭터와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다. TV 시리즈는 12월중 KBS2TV에서 방영될 계획이라고.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일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작품이 나고 자라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종이에 불과했던 플래시 <바다의 전설 장보고>는 어느새 기지개를 마치고 달려나올 채비를 하고 있다. 소년 장보고의 요란한 발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하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