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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강가에 서서, 무엇을 할 것인가?
2001-11-22

스콧 맥클루드의 <만화의 미래>

적어도 한국판 제목은 만화라는 매체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 스콧 맥클루드가 만화의 내적 형식에 대한 빼어난 저작인 <만화의 이해>(시공사 출간)의 저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만화)도 내가 만화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 알아야 하는 두세 가지 것들을 더한 ‘새로운’ 만화의 진보를 경험하는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스콧 맥클루드가 자신의 웹사이트(http://www.scottmccloud.com)에서 보여준 다양한 탐색의 종이 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나의 소박하며 단순한 기대를 짓밟았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나를 불안하게 했으며, 불편하게 했다. 애써 외면하고 잊어버리는 조악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의 그림은 페이지와 칸을 통해 나의 영혼을 잠식했다.

<만화의 미래>라고 번역된 <Reinventing Comics>는 엄격한 의미에서 ‘만화의 미래’에 대한 다채로운 예측이 아니라 ‘만화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만화의 재발명 혹은 재혁신’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만화의 미래>는 만화의 특징적인 내적 형식에 대한 탁월한 저서인 <만화의 이해>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스콧 맥클루드는 만화는 빼어난 형식을 지닌 매체인데 현재 산업적, 매체적, 장르적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 진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스콧 맥클루드는 모두 12가지의 혁신을 제시했다. 1 문학으로서의 만화, 2 예술로서의 만화, 3 창작 권리, 4 산업혁신, 5 사회적 인식, 6 제도적 관심, 7 성적 균형, 8 소수 집단 반영, 9 장르 다양성, 그리고 여기에 더한 1 디지털 제작, 2 디지털 유통, 3 디지털 만화까지. 앞의 9가지 혁신의 토픽은 이 책이 출판된 2000년 미국의 출판만화에 기준이 맞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토픽들은 마치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예문으로 든 이야기들과 작품들이 평범한 만화 팬들에게는 낯선 미국만화들이지만, 이 낯선 타자들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전미만화가협회에서 윌 아이스너는 전설적인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만화가 예술양식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러자 골드버그는 “우리는 딴따라”라고 아이스너의 견해에 강하게 반박했다. 만화에 대한 저급한 인식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며, 사회적인 왜곡과 편견도 여전하다. 게다가 만화산업은 스콧 맥클루드의 지적처럼 ‘부정적 왕국’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도 성적 균형과 소수 집단의 반영, 장르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 ‘다양성을 위한 투쟁’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조금 더 우리의 시각으로 바꾸어, 스콧 맥클루드가 이야기한 이 과제는 우리에게 깊이와 폭의 확장된 작품, 작가가 작품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창작자의 권리와 만화가 유통되고 판매되어지는 상식적인 만화산업의 구축,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과 이를 위한 제도의 정착, 그리고 다양한 만화로의 확산이라는 동일한 과제를 던져준다.

위기의 해법

그런데 스콧 맥클루드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앞의 9가지 토픽만으로는 스콧 맥클루드가 책의 서론에서 던진 “최근, 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계속 만화를 그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라는 근원적인 고민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콧 맥클루드는 ‘흐름을 따라잡기’라는 두 번째 장에서 컴퓨터와 디지털 환경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스콧 맥클루드는 새롭게 대두되는 컴퓨터에 대해 그것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다양한 효과를 손쉽게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작업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 좀더 진화한 형태의 만화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디지털 제작과 유통, 그리고 디지털만화는 빠른 속도로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불과 몇년 사이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만화의 미래>는 그 변화의 흐름을 다소 지루하게 원론적으로 접근한다. 컴퓨터 예술은 현재 출발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정의되어 이동, 확대, 복제시켜도 변하지 않는 객체-지향적인 벡터그림, 이미지의 작은 점들의 방대한 모자이크가 모인 픽셀에 기반한 비트맵그림의 두 장점이 합쳐지는 것과, 작가들이 다양한 저작도구를 숙달시키는 것들처럼 계속적으로 진보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컴퓨터를 통해 만화에 입문할 때, 전혀 새로운 만화의 모습이 재발명되리라고 이야기한다.

<만화의 미래>는 위기에 처한 만화에 도래할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만화가 새롭게 진보하는 디지털 매체에 잠식당하는 디스토피아(만화, 만화가 그리고 만화의 팬들이 보기에)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만화 근본주의자인 스콧 맥클루드는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이용해 만화를 재발명, 재혁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스콧 맥클루드의 고민이 우리에게 던져졌다. 프랭크 밀러의 말처럼 스콧 맥클루드는 <만화의 미래>라는 책을 통해 ‘만화’를 둘러싼 거대한 논쟁의 시작을 열었다. 이 논쟁은 만화의 운명 전체가 걸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투정하고 투덜거리고 있을 때, 우리 앞에는 거대한 변화의 강이 다가왔다. 그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을 것인가 아니면 변화의 강을 건너 새로운 가나안에 도달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한권의 책은 앞으로도 쭉 나를 불편하게 할 것 같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