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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화의 걸작이라는 것
2001-11-29

<드래곤볼> <슬램덩크> <오늘부터 우리는>을 여러 차례 읽으며

둘쨋놈 수능이 끝나고 만화가 다시 솔솔 집안 바닥에 널리기 시작한다. 수능성적은 예상대로 형편없지만 주눅들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사실, ‘예상대로’는 오늘의 입시제도에 비추면 행운에 가깝다. 한두 문제만 틀려도 전체 석차가 몇만등 떨어진다니, 제 실력보다 1, 2점 발휘 못했다고 꺼이꺼이 우는 학생들이 지천인 것이다.

한때 우리집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일등 가는 만화대여 손님이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탐독했고, 무얼 보는지 궁금해서 나도 같이 탐독했더니 아예 만화를 빌려오면 내 책상 위에 미리 쌓아두는 거였다. 밀린 원고만 없으면 나는 그 순간이 술자리만큼이나 행복하다. 그때는 ‘일본만화의 폐해’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지만, 난 그 폐해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너무 야하다는데, 아이들 성교육에 그토록 자연스럽고 적절한 게 없었다. 일본인들이 색(깔)에 강한 것은 짐작했는데, 냄새에 대한 감각 또한 유별나다는 것이 새로운 발견이었고 특히 위에 열거한 세 작품은 포스트모던의 어려운 논리를 형상화하는 거라서 아연 감탄했다.

<드래곤볼>은 공간-시간의 개념을 타파하는 상상력을 전개하고 <슬램덩크>는 40분 남짓의 농구 경기를 3∼4권에 걸쳐 담는데, 미니멀리스트 예술과 달리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는>은 의리파 불량학생의 심리묘사의 적나라(赤裸裸)가 절묘하고 기발하고 숨막힌다. <드래곤볼>에서 <오늘부터…>에 이르는 도정은 고상한 것과 웃기는 것의 계급질서가 갈수록 파괴되고 ‘그림’이 단순한 도식으로 ‘해체’되는 과정 또한 적절하게 보여준다(소설가 고종석씨는 <시마과장>을 권했지만 그건 어른용이고 그런 과정이 없다).

어쨌거나 난 위의 세 작품을 대략 스무번 이상 열독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웬걸, 안 보였던 부분(대사나 그림)이 또 눈에 띈다. 어허, 이것 봐라…. 이쯤 되면, 만화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만화왕국 일본에서 우리 만화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점, 이런 기본 아닐까. 물론 상대방의 위력을 무한 상승시키면서 그것을 차례차례 깨부숴가는 그 수직상승 투쟁욕은 일본 제국주의와 연관된 거라서 결코 가르치고 싶지 않지만, 한 페이지에 그림 몇점 안 그려놓고 ‘된장 냄새-여백’ 운운하기엔 좀 뭣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