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백성민의 시대극 <상자하자>
2001-12-06

문제적 군주에 대한 심리극

이 만화를 처음 본 것은 인터넷 만화사이트에서 연재를 시작할 때고 두 번째 본 것은 단행본에 수록될 리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책이 나온 뒤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나와는 꽤 인연이 많은 책인 셈인데, 이 책은 세번의 만남 동안 전혀 다른 느낌과 재미를 주었으며, 만화에 대한 눈을 더 밝게 해주었다. 표면적으로 이야기의 줄기는 수업시간이나 다이제스트된 역사 이야기 속에서 만나 친숙해진 태조, 태종, 세종 3대에 걸친 조선조 개국 초기 왕조사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민중 혹은 민중적 영웅을 주인공으로 그렸던 작가의 전작들(<장길산> <황색고래> <토끼> <삐리> 등)과 달리 임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이나 3대의 이야기를 1권에 압축한 점도 전작과는 차별되는 <상자하자>만의 특징이었다.

첫 번째 만남. 펜과 잉크, 붓과 먹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재료를 사용해 그려낸 백성민의 만화를 웹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만나게 된 것은 낯설고 이질적인 경험이었다. 인터넷만화라고 하면 컬러화면, 가로로 긴 새로운 사이즈, 인터랙티브, 동영상, 음향효과와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고, 백성민 만화는 그것과는 가장 반대편에 있었다. 그러나 백성민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주눅들지 않았다. 인터넷을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처럼 자신의 만화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실험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잡지 연재에 비해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더욱 많은 공을 들였으며, 화면을 자유롭게 사용했고 기법의 혁신을 가져왔다.

두 번째 만남. 아직 책으로 출판되기 이전 복사본 상태로 읽은 <상자하자>는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인터넷에 연재되었던 원고를 출판하기 위해 묶어놓은 이 만화는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출판만화의 화면 분할 관습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세로로 긴 한 페이지를 가로로 길게 사용한 화면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인터넷으로 볼 때 느끼지 못한 새로운 도전이자 젊은 작가들도 쉽게 시도하지 못했던 실험이었다.

세 번째 만남. 비로소 나는 백성민이 <상자하자>를 통해 화면과 칸, 표현과 연출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주었던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관습의 벗어남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음을 깨달았다. 가로로 사용된 한 페이지는 익숙한 독서의 관습을 방해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시선은 가로로 사용된 페이지를 만나면 그대로 멈춰진다. 그리고 고개가 돌아가든지 아니면 책을 돌린다. 빠른 독서를 방해하는 이 낯선 페이지는 한 단계 멈춰진 호흡으로 독자에게 읽힌다. 그리고 독자들은 백성민이 의도한 격정의 순간을 다른 칸이나 화면의 방해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된다. 빈번한 붓의 사용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기법이다. 태조나 태종과 같은 강하고 격정적인 성정의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에는 어김없이 붓이 동원되었다. 달리는 말이나 목을 치는 사람, 분노한 얼굴, 활을 쏘는 순간과 같은 극한 순간에도 붓이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펜이나 톤이 사용될 자리에도 붓이 새로운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붓은 펜과 달리 스스로 농담을 조절하고 흐름을 제어한다. 붓은 펜과 달리 힘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며, 한번의 지나감으로 힘을 담을 수도, 내칠 수도 있다. 백성민은 붓을 제어했다.

좋은 부대에 담긴 술

<상자하자>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며, 1권의 짧은 분량이이서 빠르게 독해되는 만화다. 그러나 한번 읽고 다시 몇번을 더 읽고 나면 1973년 데뷔한 이래 28년 동안 내리 만화만을 그려온 작가의 연륜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혁신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세 번째 만남을 통해 그 혁신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백성민은 독자들의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이야기의 재미를 버리는 대신 표현과 연출을 통해 독자를 사로잡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이 만화는 처음에는 다이제스트판 조선조 개국사로 읽히다가 몇번의 독해를 거쳐 가장 인간적인 욕망의 소유자인 ‘문제적 인간 태종’에 대한 섬세한 심리 드라마임을 깨닫게 만든다.

두 번째 만남을 통해 쓰여진 글(<상자하자> 말미에 수록된 평론)에서 나는 <상자하자>의 가장 독특한 점으로 백성민이 그린 최초의 왕조사라는 사실을 꼽았다. 그러나 출판된 <상자하자>를 읽으며 내 글의 오류를 깨달았다. <상자하자>의 특징은 중견작가 백성민이 보여준 혁신의 풍모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된 문제적 인간 태종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로 끝을 맺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의 소유자 태종의 얼굴에서, 그의 고민에서 나는 2001년을 살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만화, <상자하자>는 2001년 척박한 한국만화의 토양에서 수확한 가장 소중한 결실이 될 것이다. 아직 이 만화를 보지 못한 분께 <상자하자>를 권한다. 좋은 술이 담긴 좋은 부대를 만나는 즐거움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