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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 <마법의 등>
2001-12-13

거장의 자화상

어려서부터 영화를 향한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는 소년 베리만은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던 날 자기 형이 시네마토그래프를 선물로 받는 일이 일어나자 마구 울부짖었다. 결국 베리만은 그날 저녁 주석으로 만든 병정 인형 100개를 형에게 주기로 하고 시네마토그래프를 자기 소유로 만들고 만다. 이튿날 아침 그는 시네마토그래프의 손잡이를 직접 돌려보게 된다. 그때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흥분을 노년의 베리만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흥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뜨겁게 달구어진 금속의 냄새, 옷장 안의 좀약과 먼지의 냄새, 손에 잡힌 손잡이의 감촉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벽 위의 떨리는 직사각형 화면도 눈에 선하다.”

<마법의 등>은 스웨덴의 거장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쓴 책이다. 여기서 베리만은 일흔살이 거의 다 된 노령임에도 불구하고(이 책은 베리만의 나이 68살이 되는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앞에서 든 예화에서 보는 것처럼, 마치 기억력의 감퇴란 생각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아주 생생하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살려낸다. 책을 열면 우선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을 끌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는 한 소년의 모습이 보여지고 이어 엄격했던 아버지, 그토록 죽이고 싶어했다던 형, 그리고 외할머니 등이 차례로 베리만의 기억으로부터 불려나온다. 그리고는 종종 그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고통과 절망, 죽음의 풍경들과 그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화면 위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일인 베리만은 자신의 고백을 글로 옮겨놓을 때도 이미지를 다루는 것처럼 가시적(visual)이라고 할 만한 문장들을 직조해낸다. 그래서 <마법의 등>을 읽는 것은 글로 옮겨진 베리만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회고답게 <마법의 등>에는 창작에 대한 베리만의 이야기들도 실려 있다.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맡게 되었을 때 생긴 불상사들, 스트린드베리의 <꿈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겪은 난관들은 창작이라는 것의 어려움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베리만은 그 쉽지 않은 자신의 일을, 침착하고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 신중한 준비와 더 나은 것들에 대한 희망에 의존하는 사람이 할 일이라고 말한다. 무한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즉흥성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직화와 의식화(儀式化)를 수행하는, 일종의 중개자가 바로 연출자라는 게 베리만의 생각인 것이다.

<마법의 등>을 읽으면 어쩌면 지나치게 자기만의 우주에 갇혀 있는 것 같고 홀로 고통을 짊어진 것처럼도 보이는 한 인간, 그리고 예술가들을 다룬 픽션 속에나 나올 법한 괴팍하고 과도하게 완벽주의적인 한 예술가의 초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그의 내면 고백은 어떤 때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또 완전히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오히려 그런 불완전한 동화(同化)가 이걸 감동적인 고백으로 만들어준다.(이론과 실천 발간)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