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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흑수선> O.S.T
2001-12-13

무한 선율의 뒤척임

<흑수선>의 메인 테마를 맡은 최경식의 음악은 묘한 매력이 있다. <모래시계>로 대중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바 있는 그의 선율은 때로는 과도하게 감상적이긴 해도, 그 아니면 발산할 수 없는 특유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지은 곡들은 바그너의 어떤 부분을 연상케 한다. 끊임없이 지속될 것만 같은, 동시에 아무리 지속되어도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끝없는 반음계의 흐름은 에로틱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다. 이른바 ‘무한 선율’은 아주 높고 먼 세계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아주 낮은, 이 땅의 몸들의 부딪힘, 속절없는 몸부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바그너는 후자의 것을 전자의 높이로 너무 드높이려 하는데, 최경식에게서 그런 느낌까지 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영화음악 작곡가들 중에서는 최경식의 것이 가장 그런 선율들의 느낌을 개성있게 잡아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뜻. 어떻게 생각하면 유성영화 이후의 많은 영화음악이 반음계 화성의 미묘한 뒤척임과 일정하게 연루되어 있다. 할리우드는 가장 적나라하게 그 음악적 문법과 거래를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흑수선>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상처를 사건 추적의 형식으로 파헤치고 있는데, 감독은 6·25라는 핵을 가진 그 역사적 소용돌이의 가장 깊은 곳에 한 머슴 자식과 남로당 간부를 아버지로 둔 대갓집 딸과의 사랑을 위치시키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역사적 격변에 놓인 개인의 역사적 입장들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인 것이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개인들의 뒤얽힘들 배경에 놓인 역사적 입장들이라는 게 선명하지 않고 그래서 리얼리티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그 ‘깊은’ 곳에 놓인 사랑은 아주 위대한 것이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5도 음에서 시작하여 감5도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서고 그 4도 위에서 다시 한번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미묘하게 뒤척이는 그 반음계 선율은, 뒤에 나오는 스켓 목소리와 더불어 알 길 없는 비밀 속에 담긴, 아름다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어떤 운명을 관객에게 암시하고 있다. 반음계 화성이라는 것의 핵심 중의 하나가 끝없이 뒤척이지만 결국 완결되지는 않는 음들의 지속이라면, 이 선율들은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게는 그 선율이 바그너의 음악극에 나오는 인물들의 ‘위대하지만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환기시킨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선율이 가지는 의의를 지속적으로 되새겨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메인 타이틀과 함께 영화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헨델은 주제선율의 방법과는 다른 화성의 움직임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엔딩 때에 흐르는 존 레넌의 <이매진>은 영화가 갈등 속의 미묘한 뒤척임에서 ‘순수한 사랑’ 비슷한 동화적인 어떤 차원으로 모습을 바꾼 듯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주제 선율을 유도동기로 삼아 풀려나오는 다른 주제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등장시켰어야 옳았을 것 같다.

O.S.T는 근사한 장정으로 포장되어 나와 있다. 두장의 CD에 각각 이미연, 이정재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다. 이미연쪽에는 문명진, 서정훈, 전인권, 신승훈, 김범수, 이은미, 이수영, 김태욱에다가 J까지, 지명도가 있는 가수들의 음악들이 실려 있다. 영화와의 관련성보다는 상업성이 많이 고려된 듯하다. ‘이정재’의 CD에는 주제 선율과 함께 헨델의 음악 등 영화에 메인 스코어로 쓰인 음악들이 실려 있다. 팔리기는 좀 팔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