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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영 <힙합 커넥션: 비트, 라임, 그리고 문화>
2001-12-20

힙합- 흑인의, 흑인은 아닌

한국을 포함해 현재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음악장르는 단연 힙합이다. 힙합은 이제 하드코어, 랩메탈 같은 혼합장르뿐 아니라 일반적인 팝음악에까지 삼투해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한국의 주류 댄스음악에서도 힙합이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는 쉽게 발견된다. 하지만 힙합은 여전히 한국에선 낯선 존재다. 두터운 마니아층과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연구가 진행돼 있는 록에 비하면, 힙합에 관한 담론은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듯하다.

힙합의 역사에서부터 다양한 갈래, 사회학적 의미 등까지 일관된 맥락으로 분석하는 <힙합 커넥션>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뉴욕의 뉴욕시립대학교(CUNY)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저자 양재영은 3년여 동안의 미국 생활 동안 관심을 기울여온 힙합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이 책을 통해 쏟아놓는다. ‘힙합에 대한 체계적인 지침서 혹은 가이드 북’을 만들려고 했다는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책은 음악장르로서의 힙합만을 표면적으로만 훑어내리는 실용서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비트, 라임, 그리고 문화’라는 부제에서 연상할 수 있듯 그는 힙합을 단지 하나의 음악장르나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사회라는 커다란 배경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역동적인 문화의 흐름으로 파악한다.

그가 서문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거듭 강조하는 바는 “힙합을 네그리튜드(negritude)의 반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 아프로-아메리칸(흑인)에 대한 다소 경멸적인 표현인 ‘negro’와 태도를 의미하는 ‘attitude’의 합성어인 ‘네그리튜드’는 흑인만이 지닌 고유한 태도, 즉 험악한 게토 생활에서 배어나오는 일관되게 반사회적이며, 반백인적이고, 반질서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실제로 90년대 초반의 갱스터랩을 대표격으로 이같은 네그리튜드는 힙합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돼왔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힙합은 폭력적이고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흑인들이 자신에게 쌓여 있는 분노를 폭발하는 매체로 파악되고 있다. 저자는, 하지만 이같은 시각은 “대도시 아프로-아메리칸 게토 공동체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간과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네그리튜드란 반여성, 반동성애를 표방하는 흑인 남성 집단의 마초주의적 성향을 반영하는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이같은 네그리튜드는 흑인사회에 관한 백인 학자들의 선입견 가득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다. 이 연구과정에서 백인 학자들은 미국사회의 근본적인 구조적, 인종적 불평등을 건드리기보다는 게토 남성들의 개인적 불만과 저항적 태도를 확대해석했고, 이 결과 흑인에 대한 편협된 이미지가 형성됐다는 얘기다.

대신 저자는 “힙합을, 백인 주류사회와 문화산업에 의해 주조된 과장되고 왜곡된 단어인 ‘네그리튜드’를 두고 백인 주류사회와 아프로-아메리칸 청년들이 경합을 벌이는 하나의 문화적 장으로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힙합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읽어내고, 다층적이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는 힙합의 경향을 조명하는 저자의 꼼꼼한 ‘맥짚기’는 이같은 전제를 성실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나서 그는 힙합을 다양한 문화의 하이브리드로서, 또 샘플링 같은 기술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책이 문화연구서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저 힙합의 리듬, 라임만을 좋아하는 팬에게도 힙합이라는 문화와 이를 이끌어온 MC, DJ들의 연대기는 흥미롭게 읽힐 것으로 보인다. 특히 힙합 마니아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이들에게 고전 힙합음악에서부터 숨겨진 명반까지 소개하는 3부 ‘힙합 앨범 리뷰’는 괜찮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서출판 한나래 펴냄) 문석 ssoo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