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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가 사는 법, `쓸모 없어도 산다!`
2001-12-27

<아니메 점장>

웬만한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면 알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의 하나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야키의 신작 애니메이션이 내년 1월에 공개된다고 한다. <유성과장>과 같은 실사작품에 매진하던 안노 감독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다는 별다른 소문없이 갑자기 나온 소식이라 엄청난 비밀 대작 프로젝트를 기대하는 팬층도 많겠지만, 아쉽게도 2분 분량의 프로모션 작품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 체인인 ‘애니메이트’에서 자체적으로 기획하는 행사인 ‘animate EXPO 2002’(2002년 1월13∼14일)에서 상영될 <아니메 점장>은, 애니메이트에서 2000년 10월경부터 CM캐릭터로 만들어진 ‘아니자와 메이토’라는 캐릭터숍 ‘점장’이 주인공이다.

이 캐릭터를 만든 시마모토 가즈히코가 가이낙스 초기 시절의 OVA 작품인 <불꽃의 전교생>의 원작 만화가란 점에서 어느 정도 인연이 있긴 하지만, 실제 안노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은 이때까지 미소녀나 어여쁜 동물 일색인 상점의 캐릭터의 이미지를 일신한 채 마니아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생각과 일치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니자와 메이토’는 그 원작자의 성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엄청나게 뜨거운 ‘열혈’ 캐릭터이다. 28살로 설정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동은 거의 일본 고등학교의 응원단장 수준이다. 캐릭터숍은 보통 개개인이 선호하는 이미지에 부합되는(실생활에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 물건을 파는 곳이다 보니, 마니아라 하더라도 자기가 찾는 물건만 사가지고 돌아가는 일종의 한정된 폐쇄공간에 가깝다. 하지만 이 ‘아니메 점장’은 단순히 물건을 팔기 위한 판촉적인 의미의 캐릭터상보다는 판매자와 구매자의 중간자적 입장에서 서서 행동하다 보니 어떨 때는 자기 상점에 대한 비판까지도 하며 ‘애니메이트’라는 거대 체인망의 나아갈 방향까지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쓰이고 있다.

`초회 한정판’이라는 딱지가 붙은 상품이나 새로 발매되는 게임기를 사기 위해 몇날 며칠 밤을 새우며 가게 앞에서 줄을 서는 모습은 이제 토픽감도 안 될 만큼, 일본의 콘텐츠 산업은 마니아가 주도해나가는 실정이다. 그러한 콘텐츠 산업은 90년대의 폭발적 증식기를 지나 이제 예전처럼 자기의 취미를 숨기거나 무작정 몰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되돌아보고 즐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쓸모는 없겠지만 사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라고 대놓고 소리치는 <아니메 점장>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숍 광고나 다름없는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것이 그 방증일 것이다.

얼마 전 2001년도 한국 10대 캐릭터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선정된 캐릭터들의 거의 대부분은 실제로 캐릭터숍의 극히 일부분만을 채울 정도의 상품밖에 없고, 여전히 70∼80%의 해외 캐릭터가 국내시장을 주도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83년에 시작해 근 2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한국에서 가장 생명력이 긴 캐릭터인 ‘아기공룡 둘리’도 ‘미키 마우스’나 ‘도라에몽’처럼 전문 체인숍이 생기고 거기서 어린이용은 물론 둘리의 첫회를 보고 자란 필자의 나이에 걸맞은 성인용 캐릭터 상품까지도 판매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비층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욕구를 선도해낼 수 있는 힘도 필요한 시기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