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흐르는 강물처럼
2001-03-09

루시드 폴의 [Lucid Fall]

루시드 폴 / 라디오 뮤직 발매

루시드 폴은 <송시> <파노라마> <시간> 등으로 알려진 미선이의 메인송라이터 조윤석이 1년여에 걸쳐 준비한 솔로 프로젝트이다. 98년 데뷔앨범 [Drifting]을 발표한 미선이는 기존 밴드의 일반적인 방식에서 조금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록’보다는 ‘팝’을, 그것도 주류 팝이 아닌 보사노바나 뉴에이지를 즐겨 듣던 미선이의 연주는 ‘저항’이 아닌 ‘서정’에 중심이 실려 있었고, 이들은 어떻게 연주하느냐보다는 무엇을 노래하고 싶은지에 충실했다. ‘개 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꽃이 피네’(<진달래 타이머>)라고 여린 발성으로 자신의 눈에 비치는 세상을 노래하던 미선이는 요란스런 프로모션 없이도 천천히 팬들의 반응을 얻었고, [Drifting]은 몇년이 지난 지금도 팬들이 꾸준히 찾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Drifting]은 최근 4곡의 보너스 트랙이 추가되어 [Drifting Again]이란 이름으로 재발매되었다). 현재 미선이는 멤버의 군입대로 활동이 중지된 상태이다.

허물어져가는 주변과의 관계, 일그러진 연인의 초상, 무기력한 그리움. 나일론 기타 아르페지오의 느릿한 흐름을 타고 흐릿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루시드 폴의 셀프타이틀 앨범에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감정의 굴곡이 발꿈치의 생채기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다가오는 통증처럼 세심하게 새겨져 있다. 이러한 면모는 미선이가 여타 밴드뿐만 아니라 ‘모던록’ 밴드로 통칭되는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은희의 노을 등과도 차별되는 감성을 전하는 이유였고, 루시드 폴은 이러한 미선이 시절의 감성이 좀더 세밀하게 확대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조윤석이 [Drifting]을 발표하며 밝혔던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음악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일상에서 놓치곤 하던 감정이나 경험들을 자각하게 되는 것, 그래서 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제 이상적인 바람이에요. 눈을 감든, 누워서 듣든 아무 상관없는 거죠. 느낌이 있는, 생각이 담겨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앨범의 시작을 여는 <새>(밴드 버전)에서 다시 <새>(조윤석의 친우 이규호가 부른 어쿠스틱 버전)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한 호흡으로 일곱 트랙이 지나간다. 이는 근래 국내의 어떤 싱어송라이터에게서도 보지 못한 면모다. 주류 가요에 익숙한 이들에겐 이러한 점이 지루함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앨범 내에서 하나의 흐름을 갖는다는 것은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에 대한 마인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소중한 점이다. 그래서 좀 뜬금없다 싶은 힙합 트랙 [Take 1[의 선택이 아쉽게 느껴진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두곡의 인스트루멘틀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Outro]까지 모두 열곡이 실려 있는 <루시드 폴>은 나일론과 스틸 어쿠스틱 기타, 오보에, 아코디언 등 어쿠스틱 악기가 중용되었고,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친밀한 사운드를 내고 있다.

현란한 비트나 멜로디의 심한 굴곡없이 이야기하듯 노래하는 루시드 폴의 곡들은 마치 70년대 모던 포크와 뉴에이지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처럼 들린다. (무리한 비교임을 감수하자면) 감성적으로 영미의 80년대 인디팝 밴드와 90년대 후반 포크팝 싱어송라이터들의 자기고백적인 작업물과도 연결고리가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루시드 폴>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나의 하류를 지나> <풍경은 언제나> <은행나무 숲> 등에서 들리는 우리말로 풀어낸 사려깊은 가사들과(‘나는 이미 찾는 이 없고/ 겨울 오면 태공들도 떠나/ 해의 고향은 서쪽 바다/ 너는 나의 하류를 지나네’(<나의 하류를 지나>)) 그것을 온전하게 들리도록 하는 사운드의 어울림이다. 그래서 루시드 폴의 곡들은 무리하게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곡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렇게 가식적이지도 넘치지도 않는 감정의 여정을 얼마 만에 만나는 것인지, 미친 듯이 눈이 쏟아지는, 그래서 세상도 덩달아 미쳐가는 지금 루시드 폴은 함께 부대껴도 좋은,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로 다가온다.

김민규/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