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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교정의 <올웨이즈>
2002-01-03

다시 문제는 이야기다

결국 문제는 이야기다. 연이은 술자리에서 요즘 도대체 어떤 만화를 보아야 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나서 얻은 결론이다. 재미있는 만화의 핵심은 이야기에 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스타일이 되고, 캐릭터가 기호가 되면서 이야기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편집자와 작가는 독자들의 1차적 반응, “캐릭터가 열라 예뻐여!”라는 환호에만 관심을 갖는다. 새로운 만화를 연재하려 할 때, 시놉시스의 충실성을 검토하기보다 컬러로 멋지게 그려진 캐릭터의 뽀시시함을 확인한다. 확인된 수치가 데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잘생긴 미남 배우를 캐스팅하듯 그렇게 캐릭터를 선택한다. 결국 미소년, 미소녀들이 지면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는 식의 언술만이 힘을 얻고, 이야기는 미소년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장치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이야기를 잊게 되었고, 잃어버리게 되었다. 미소년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미소년의 두근거림에 동참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꽃배경이 흩날려도, 강한 카리스마를 강조해도 이야기가 힘을 잃고 나니 미소년도 무미건조해질 뿐이었다. 독자들은 점점 만화를 외면했고 만화는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페이지마다 애드리브를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사라진 상처는 처참했다. 오스칼(<베르사이유의 장미>), 카즈야와 미츠루와 시노부(<여기는 그린우드>), 미스터 블랙(<굳바이 미스터 블랙>), 유리핀 멤피스(<북해의 별>), 레디온(<별빛속에>)과 같은 꽃미남(녀)들이 단지 외형적 디자인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힘을 얻었다는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살았던 대가는 처참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승승장구하며 한국만화의 대안으로까지 불리던 순정만화는 한해를 결산하는 만화를 골라내기도 힘겨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야기의 힘을 아는 작가

<올웨이즈>의 작가 권교정은 이야기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에 대한 문제에 접근한 <헬무트>나 SF라는 시공간 속에서 시간 속에서 불멸하는 주인공과 그리고 고립된 우주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낸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에 기초한 학원물 <어색해도 괜찮아> <정말로 진짜!>의 공통점은 이야기가 읽힌다는 점이다. <올웨이즈>는 작가 스스로 ‘F물’이라 명명한 장르의 만화다. 꽃미남들의 정신적·육체적 사랑을 그린 야오이 만화를 지칭하는 ‘Y물’과의 의식적인 거리두기를 위해 고안된 장르명이다. 요컨대 멋진 두 남자 친구의 돈독한 우정은 있지만 끈끈한 애정고백이나 육체적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간혹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묘한 감정의 묘사나 얼굴 붉어짐, 가슴 두근거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그만이다.

<올웨이즈>는 멋진 남자 고등학생 안기현, 이태경이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일상 속에서 친해진다는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분량도 1권에 불과하다. 서로 부딪쳐 상처나기, 비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가기, 서로 얼굴 바라보고 부끄러워지기 같은 익숙한 컨벤션이 등장하지만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의 취향과 해석에 따라 <올웨이즈>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친구가 되어가는 일상의 우정을 다룬 만화가 되기도 하고, 미묘한 동성애만화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남자들의 우정, 사랑보다 아름다운

전자거나 후자이거나 이 만화의 힘은 멋진 두 주인공 안기현과 이태경의 매력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 작가는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한 어떤 잔재주도 부리지 않는다. 꽃이나 독특한 문양 따위로 주인공의 뒷배경을 메꾸거나 아니면 몇개의 칸을 가로질러 주인공이 등장할 법도 하지만 주인공들은 칸 속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데만 열중한다. 그 이야기도 대개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것들로 억지로 만들어낸 가공의 냄새가 없다. 만화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각각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지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보면 캐릭터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고, 그들의 고민도 나눌 수 있다. 디지털 서사라는 낯선 담론이 등장하고 있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서사가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가 작품과 나를 이어주기 때문이다. 한없이 얇아진 이야기의 무게, 그래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처럼 나약한 이야기의 뼈대에 과도하게 무거워진 캐릭터들과 애드리브와 개그가 얹혀 있다. 이 비극적인 영양결핍의 상태가 오늘 한국만화가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다. 다시 문제는 이야기다. 박인하/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