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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에 대한 집착, <워터쉽다운의 토끼들>
2002-02-07

anivision

‘판타지(fantasy)물’이라고 하면 흔히들 <반지의 제왕>이나 <디아블로>처럼 드래곤과 마법, 중세풍 기사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엄밀히 말해 ‘판타지물’이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칭하는 의미로 ‘SF’나 ‘가상역사소설’, ‘동물우화’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아이들의 필독도서가 된 지 오래인 <이솝우화> 역시 이러한 ‘말하는 동물’이라는 비현실 소재가 차용된 ‘판타지물’인 것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의인화되거나 사람의 말을 하는 동물캐릭터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자주 등장한다. 일단 특징을 잡아 디자인하기가 쉽고 일반적으로 각각의 동물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른 성격 배정이 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물에 대한 이미지들은 어릴 적 보았던 우화의 영향이 크다보니 여우는 간사하고, 곰은 미련하다는 식으로 편향적으로 되게 마련이고, 그것은 그림 및 디자인이 가해지면서 더욱 고정화된다.

<워터쉽다운의 토끼들>은 1972년 발표된 이래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영국이나 미국 등지의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수천만부가 팔려나간 리처드 애덤스 원작의 동명 베스트셀러 판타지소설을 모태로 1979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여기에는 어떠한 과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토끼들이 등장한다. 겁을 먹으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나 주위를 경계하며 뛰어가는 모습들은 영국의 자연을 잘 살려낸 유화 같은 풍경 속에 잘 녹아들어 마치 동물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소설의 내용을 너무 축약시켜 일부 원작 팬들의 원성도 듣긴 했지만, 토끼가 다른 동물처럼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은 가지지 못한 채 큰 귀와 튼튼한 뒷다리를 가지고 도망만 치게 되는 사연을 동화풍의 그림으로 설명한 프롤로그나 예지능력을 지닌 ‘파이버’의 경고에 따라 일부의 무리를 이끌고 새로운 정착지를 향하는 ‘헤젤’과 동료들의 힘든 여정을 그려낸 로드무비와 같은 전반부, 수컷밖에 없는 무리의 존속을 위해 ‘장군’이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토끼독재자가 지배하는 에쿠라파 마을로 잠입해 지략으로 암컷 토끼를 탈출시키며 뒤쫓아온 추적자와 사투를 벌이는 후반부는 웬만한 첩보물이나 전쟁물을 능가한다.

토끼들을 중심으로 한 동물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처절하게 피를 흘리며 싸우는 모습이나 인간들에 의해 원서식지의 동굴이 메워지면서 나갈 곳 없이 질식하여 죽어가는 토끼들의 모습은 생물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생존에 대한 집착’을 다른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보다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원서식지의 토끼들이 죽음을 당하는 이유가 ‘인간의 야채밭을 건드렸다’는 식의 현실적 이유가 아니라 그곳을 인간의 살 곳으로 바꿔버리는 데 ‘거치적거린다’는 이기적 이유 때문이라는 대사는, ‘미키미우스’나 ‘도널드 덕’ 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동물들의 실재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해준다.

국내에서는 정식으로 발매된 적이 없고 해외에서도 초기에 발매된 레이저디스크나 비디오의 양이 적어 그동안 희귀작품으로 취급받아왔지만, 올해 3월 말에 미국에서 DVD와 비디오로 재발매될 예정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