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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집 <두고 온 시>
2002-02-07

허랑방탕과 광대무변

최근 몇년 동안 고은의 시는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김대중 정부 수립 직후부터. 그가 ‘김대중 정부 시인’인 듯 비쳐졌을 때부터다. 정치와 문학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라는 것은, 당연히 거리를 전제한 명제다. 그 거리가 관계를 허용하고 만남의 변증법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너무 정치적’인 고은의 시는 행태와 구분되지 않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던 걸 게다.

그런데, 이번 시집 제목이 요상하고 흥미롭다. ‘두고 온 시’라. 뭔가 다른 얘기를 좀 하시려는가…. 그런 생각쯤으로 미적미적 시집을 뒤져 읽는데 갈수록 신기하다. 어허, 이런이런…. 그렇게 감탄 혹은 탄식을 하다가 나는 흡사 정신을 차리려 기를 쓰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허, 허랑방탕, 광대무변, 허랑방탕, 광대무변… 그러다보니 꼭 색즉시공공즉시색을 되뇌는 중과 다를 바 없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많은 평자들이 얘기했던 그 반성조, 이를테면 12쪽 ‘최근의 고백’의 ‘한밤중 혼자 흐득흐득 울고 울었던/ 그 울음의 소용돌이 어디로 갔나/ 이토록 내 등뼈에는 슬픔이 없어졌다/ 모든 감탄사는 허망하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회고에 물든 반성은 반성이 아니다. ‘거침없는 상상력’(황석영 표4문)도 아니다. 왜냐면 고은의 상상력은 언제나 거침없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파란만장(고은의 대명사였던)의 이전인 허랑방탕과 그뒤인 광대무변을 한데 뒤섞어버리는, 과감하고 위대한 허무의 몸짓이다. 그때 허무는 회고를 벗고 미래를 향해 무거워진다. 가령, 62쪽 ‘향노봉’. 첫행 ‘바람 속에 서 있을 때가 가장 사람다웠다’는 회고의 위험이있지만 ‘저 검은 동해/ 가득한 파도소리도/ 여기까지 오지 못한다/ 여기는 돌멩이들 휭휭 날아가는 바람소리’의 허랑방탕이 ‘북쪽을 보라/ 온통 산들이다/ 인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남쪽을 보라/ 온통 산들이다’의, 현실인식을 담지하는 광대무변에 가닿고 그 둘의 혼융이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가면 가까스로 살아남’는, ‘가벼움은 죽음’이라는 허무의 무게와 깨달음에 달한다.

‘문의 마을에서’ 이래 나는 고은 시가 지닌 죽음의 미학의 순결성이 파열하는 것이 늘, 갈수록 괴로웠다. 하지만, <두고 온 시>를 보니, 쓸데없는 고통이었다는 생각이든다. 파란만장을 심화-확대하는 허랑방탕과 광대무변의 중첩. 그 속에서는 그의 정치‘행각’도 한낱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감사 또 감사….(창작과비평사 펴냄)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